올해는 중국 공산당이 창당한 지 100주년이 되는 해이다.
2012년 제18차 중국공산당 전국대표대회에서 총서기에 오른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은 “아편전쟁 패배를 기점으로 170여년에 걸쳐 중화민족이 겪었던 좌절과 성공의 역정을 총괄하고 이를 바탕으로 건국 100주년이 되는 2049년까지 중화민족의 위대한 부흥을 실현하는 것”이라는 ‘중국몽(中國夢)’을 제시하였다. 더불어 중국 공산당 창당 100주년이 되는 2021년에 GDP에서 미국을 추월하는 것을 목표로 삼기도 하였다.
올해 신년사에서 시진핑 주석은 중국 공산당 창당 100주년을 기점으로 “천추의 대업을 지향하는 중국 공산당은 인민을 중심으로 초심을 견지하며 중화민족의 위대한 부흥을 기필코 실현할 것”이라고 각오를 다지며 중국몽 실현의 포부를 재차 강조하였다. 2020년 코로나19 팬데믹 상황으로 전 세계가 심각한 경제적, 사회적, 정치적 위기 국면에 빠진 가운데 하반기에 코로나19를 통제하며 경제성장률까지 다시 끌어올렸던 중국이기에 이와 같은 자신감을 표현할 수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비록 올해 GDP에서 미국을 따라 잡는 것은 힘들겠지만 이와 같은 경제 성장 추세로 나아간다면 경제적인 면에서 중국이 미국을 능가하는 시기는 경제 전문가들의 기존 예상보다 훨씬 빨라질 수 있을 것이다. 영국 싱크탱크 경제경영연구소(CEBR)는 ‘세계 경제 순위표’ 보고서에서 중국이 2023년 고소득 국가에 진입하고 2028년에는 미국을 앞서는 경제 대국이 될 것이라고 전망하며 예상 시기를 5년 앞당겼던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중화인민공화국 건국 100주년이 되는 2049년까지 군사력까지 포함한 전체적인 국가 수준을 평가할 때 중국이 명실상부한 세계 초강대국의 위치에 오를 것이라는 전망은 어렵지 않게 내놓을 수 있다.
오늘날의 중국을 분석할 때 양적 규모에서의 성장은 여러 면에서 뚜렷하게 파악할 수 있다. 경제성장률, GDP, 무역량, 기술력, 산업화, 도시화, 정보화 등 겉으로 드러나는 변화의 속도는 몇 년에 한 번 중국을 방문할 때 마다 깜짝 놀라게 하는 부분이다. 하지만 창당 100주년이 되는 지금 중국 공산당 창당의 목적이자 기초가 된 ‘인민’, 그 중에서도 ‘농민’의 삶은 얼마나 발전했을까? 이를 알기 위해서는 먼저 중국 공산당 창당 당시 농민이 처한 상황과 역할에 주목했던 중국의 주요 인물들에 대해 살펴봐야 할 것 같다.
1921년 중국 공산당 창당 당시 중국 농민은 전체 인구의 90% 이상을 차지하고 있던 절대 다수 인민으로서 제국주의 국가들의 간접 지배를 받고 있던 군벌들의 폭압적 통치 아래에서 가장 극심한 피해를 받으며 신음하고 있던 사람들이었다. 1917년 러시아 혁명과 더불어 중국에 전해져 온 마르크스-레닌 사상에 입각해 중국의 낙후되고 열악한 정치‧사회 구조를 변화시키고자 모색하고 있던 지식인들 중 이들 절대 다수 농민에 기반을 두어 중국 혁명을 이루고자 했던 대표적인 사상가·정치가이자 중국 공산당 창당의 주역이었던 인물이 바로 리다자오(李大釗)와 마오쩌둥(毛澤東)이다.
리다자오(1889~1927)는 5·4 운동(1919년)을 전후로 한 시기에 중국에 마르크스주의를 소개하고 전파하여 중국 사회주의의 기원이라고 일컬어지는 인물이다. 또한 1920년 베이징(北京) 공산주의 소조를 발기하고 1921년에는 중국 공산당 창당에 참여하는 등 천두슈(陳獨秀)와 더불어 대표적인 중국 초기 공산당원으로 잘 알려져 있다. 그의 사회적 활동기간은 최초로 정치적 논설을 발표하기 시작한 1913년부터 베이징에서 군벌에 의해 체포되어 사형당하는 1927년까지 겨우 15년에 불과하였다. 하지만 그 동안에 그는 21개조 반대운동, 위안스카이(袁世凱) 반대 운동, 러시아 혁명의 소개 및 마르크스주의의 도입, 5·4 운동, 중국공산당 창당, 국공합작, 농민운동 등 중국현대사의 핵심적인 문제에 관여하거나 주도적 역할을 담당하였다. 이렇게 그는 당시의 여러 가지 국가적·사회적 문제에 직면하여 중국의 역사적 방향을 설정하고 인민을 인도하려 한 진보적 지식인이었다. 특히 마르크스주의를 체계적으로 중국에 소개하였다는 것과 그의 사상이 중국 사회주의에 특수한 성격을 부여하였다는 것은 주목할 만한 일이라 할 수 있다.
1917년 러시아 10월 혁명 이후 리다자오는 볼셰비즘과 레닌주의의 세례 속에서 그 기초가 되는 마르크스 학설을 연구하기 시작하였고 이와 함께 러시아 혁명과 관련된 역사를 탐색하였다. 이 과정에서 그는 농민을 중심으로 하는 민중에 대한 인식과 함께 중국적 공산주의 운동이라는 새로운 색채의 공산주의 전략을 수립하는 데 적지 않은 영향을 주게 될 사상인 러시아 인민주의(人民主義; Narodnikism)를 접하게 되었다. 러시아 인민주의 사상은 제국주의 및 군벌에 대항해야 했던 중국 사회의 상황에 접목되어 리다자오로 하여금 당시 중국이 성취해야 할 사회 혁명의 동력을 깨우치고 인식하게끔 해주었다. 그리고 이것은 중국에서 농민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그들의 역량을 자각함으로써 사회혁명의 주요세력으로 삼고자 한 리다자오의 인민주의적 관점에서 점차 드러났다. 리다자오의 인민주의적 관점은 1919년에 발표한 「청년과 농촌」이란 글에서 두드러지게 표현되었다. 이 글에서 그는 러시아를 예로 들면서 중국 청년이 농촌에 가서 농촌을 계발하고 농촌을 개조할 것을 호소하였는데, 리다자오는 중국 청년이 러시아 인민주의자를 본받아 민중 속으로 들어가야 한다고 인식했던 것이다. 또한 농민을 대하는 태도에서도 리다자오는 러시아 인민주의자와 마찬가지로 농민을 중시하여 농민을 사회의 주요세력으로 보았다. 그러므로 청년 지식인들이 농촌으로 가서 노동단체에 가입하고 현대의 신문명을 농촌에 도입하여 농민의 역량을 자각시킴으로써 그들을 혁명주체세력으로 만드는 것이 필요하다고 주장하였다. 이는 1925년 말 그가 「토지와 농민」에서 국민혁명의 완성을 위해 농촌혁명이 맡아야 할 역할에 대해 생각하며 농민의 혁명 참여가 곧 국민혁명의 성공으로 이어질 것이라고 예언한 것과 같은 맥락이라고 할 수 있었다. 즉 리다자오는 인민주의의 영향을 받아 중국의 인민을 대표하는 ‘농민’으로 눈을 돌릴 수 있었으며 이후 중국적 프롤레타리아와 사회주의혁명의 중국적 실현을 모색하는 데 필요한 민중적 기반을 마련할 수 있었던 것이다.
한편 중국 공산당 창립인 중의 한 사람이자, 내전과 항일이라는 절체절명의 위기 국면 속에서도 중국 사회현실에 적합한 사상과 전략을 통해 중국 공산당을 승리로 이끌며 중화인민공화국을 건립한 주역인 마오쩌둥(毛澤東) 또한 이러한 리다자오의 사상을 계승한 인물로 농민혁명을 실제로 이끈 사람이었다.
마오쩌둥은 창사의 호남제일사범학교를 졸업하고 난 후 1918년 베이징에 와 당시 베이징 대학 교수이자 도서관 관장이었던 리다자오 밑에서 도서관 사서로 근무하며 마르크스주의를 접촉하였다. 마오쩌둥은 후일 회고담에서 “5·4 운동 기간이 중국의 정치적·지적 생활에 있어서 ‘부르주아’의 지배와 ‘프롤레타리아’의 지도 사이의 분수령이었다.”라고 하며 그가 베이징 대학에서 근무하던 5·4 운동 시기에 접하게 된 마르크스·레닌주의의 영향이 컸다고 술회하였다. 그리고 받게 된 사상적 영향은 당시 학문적 스승이라고 할 수 있었던 리다자오의 사상적 경향과 무관하다고 보기 어려웠다. 즉 리다자오의 인민주의적 관점은 마오쩌둥의 글에서도 드러나고 있었던 것이다. 마오쩌둥은 1919년 『상강평론(湘江評論)』에 기고한 글들을 통해서 민중의 역량에 대해 자각하였고 1927년 「호남농민민운동고찰보고(湖南農民運動考察報告)」에서는 농민을 중국혁명의 원동력으로 상정하였으며, 이후의 혁명 전략에서 농민을 중국의 주요 혁명세력으로 파악함으로써 농민 혁명을 통해 중국 혁명을 완성하고자 했던 것이다.
리다자오와 마오쩌둥은 한결같이 당시 중국 사회에서 가장 혹독한 착취를 받고 있던 농민의 혁명적 역량에 주목하며 이들을 이용하여 중국의 공산혁명을 성취하고자 하였다. 그리고 이러한 염원은 결국 현실화 되어 1949년에 중화인민공화국이 건립될 수 있었다. 그렇게 본다면 ‘인민’의 대표자인 ‘농민’은 다름 아닌 중국 공산당과 중화인민공화국 건설의 이유이자 목적이었고 사회적 기초였다고 할 수 있다. 즉 중국 공산혁명에 매진했던 수많은 지식인들과 공산당원들은 농민으로 대표되는 인민을 매개로 하여, ‘인민의’, ‘인민에 의한’, ‘인민을 위한’ 국가를 건설하고자 하였던 것이다.
중국을 여행하다 보면 모든 관공서 정문 앞에 ‘인민을 위해 복무한다(爲人民服務)’는 현판이 달려 있는 것을 흔히 볼 수 있다. 그럴 때마다 ‘붕어 없는 붕어빵’과 같은 표현이라고 생각한 적이 많다. 오늘날 농민의 비율은 전체 인구의 50% 이하로 감소하기는 하였지만 아직도 엄청난 수의 인구가 농촌에 살고 있다. 이들 농민의 평균 수입은 도시 주민 평균 수입과 비교해 봤을 때 실제로는 4~6배, 많게는 10배 이상 차이가 나고, 이러한 양극화 속에서 많은 농촌 인구가 ‘농민공’이라는 불법체류자의 신분으로 도시에서 일하고 있는 상황에서 볼 때 국가를 관리하는 사람들에게 ‘인민’은 누구를 말하는지 묻고 싶기도 하다. 2002년 제16차 중국 공산당 전국대표대회에서 장쩌민(江澤民)의 ‘3개 대표 사상’이 당 헌법에 명문화 되었는데, 이중 “중국의 선진 사회 생산력의 발전 요구를 대표한다.”는 구문은 사실상 중국 공산당이 ‘자본가’를 대표한다는 뜻으로 자본주의 발전 노선을 구체화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제 농민, 노동자로 대표되던 중국 ‘인민’의 범위 안에는 제도적으로 사회의 많은 ‘가진 자’들이 포함되었고 이는 ‘가지지 못한 자’들에 대한 불평등으로 이어지고 있다.
중국 공산당 창당 100주년이 되는 올해 중국의 최고 지도자는 “인민을 중심으로 초심을 견지”하여 머지않은 시기에 중국몽을 실현하겠다고 다짐하고 있다. 중국 공산당을 창당하던 시기 중국의 지도자들이 상정했던 ‘인민’은 100년이 지난 오늘날 그들을 위한 나라에서 살고 있는지, 그리고 이 ‘중국몽’은 바로 그들 ‘인민’을 위한 꿈인지 다시 한 번 되새겨 봐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