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중관계의 역사구조적 기원: 한중 외교 30년 회고에 부쳐

1992년 8월 24일 중화인민공화국과 대한민국이 외교관계를 맺기로 합의한 이래 30년의 세월이 경과했다. 한중 수교 30년 동안 양국 관계는 비약적으로 발전하였다. 한중 수교가 양국의 국가이익에 작용한 대차대조표를 면밀히 검토하기 전에 한중 수교를 역사구조적인 차원에서 이해할 필요가 있다. 19세기 중반 중국(清제국)은 1840년 아편전쟁에 이은 난징조약 그리고 한국(조선)은 1876년 강화도 조약을 계기로 본격적으로 제국주의 열강의 도전을 받기 시작했다. 이 역사의 시험대에서 봉건왕조체제의 리더십은 각각 중체서용(中體西用) 혹은 동도서기(東道西器)의 접근방식을 취했지만, 독립적이고 자율적이며 효과적인 근대 국가수립에 실패했다. 근대 이전 유교문명권에서 봉건체제의 왕조 국가들은 반복적으로 발생하는 왕조 순환의 위기를 갖고 있다. 청과 조선의 정치 리더십은 모두 이 시기에 내부로부터의 위기, 예를 들면 태평천국의 난과 갑오농민전쟁 등에 효과적으로 대응하지 못했다는 점에서 공통점을 갖고 있지만, 외부적인 요인이 작용했던 방식에서는 차이점이 존재했다.
청과 조선에게 외부적인 요인이 다르게 작용했던 방식은 크게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문을 두드린 서양 열강의 수이고, 다른 하나는 이 외부적 힘이 작용한 플랫폼으로서의 국가 규모이다. 일본은 강화도 조약 1조에 ‘조선은 자주독립국이다’라는 조항을 넣으면서 조선에 미치는 기존 종주국 청의 영향력을 제거하고자 했다. 메이지 유신 개혁을 통해 근대국가로 급속히 성장하던 일본은 1895년 청일전쟁의 승리로 맺은 시모노세키 조약을 통해 조선에 대한 지배력을 현실화시켰다. 물론 일본을 견제하고 청의 영향력을 유지하고 싶었던 리홍장의 권유로 구한말 조선은 서양세력과 최초의 근대적인 외교관계를 수립하였다. 그러나 서양 열강들이 한반도에 갖고 있던 관심은 부차적이었다. 정한론(征韓論)이 시사하는 바와 같이 일찍이 대륙진출의 야망을 키우고 있던 일본만이 한반도에 직접적인 영토적·경제적 욕망을 갖고 있었다. 그리고 일본의 영향력은 상대적으로 작은 규모의 조선 영토에서 실현될 수 있었다. 반면 영국, 독일, 프랑스, 미국 등 많은 제국주의 열강들은 인도와 동남아시아와 지정학적으로 연계된 중국대륙에 관심을 갖고 있었다. 홍콩, 상하이, 광저우, 텐진, 베이징 등지에는 조차와 할양을 통해서 서구의 문물이 유입되었고 서양인들이 활동하는 조계지역이 형성되었다. 광대한 중국대륙에서 얻을 수 있는 이익을 둘러싸고 제국주의 열강들이 각축하는 게임이 시작되었던 것이다.
외부적 요인이 한반도와 중국대륙에서 다르게 작용하는 상황에서 조선은 빠른 속도로 세력을 확장하는 일본에 의해 1910년 병합되어 주권을 상실했다. 일본이 지정학적인 라이벌 청과의 청일전쟁에 이어 러시아와의 러일전쟁(1904-5)에서 승리한 결과이다. 조선은 봉건왕조체제가 붕괴되고 공화정의 근대국가로 이행하는 내재적인 발전과정이 부재한 상태에서 일본에 의해 강제 점령되어 식민지가 되고 만 것이다. 이 점은 제2차 세계대전 직후 한반도 북쪽 지역에서 사회주의 체제의 근대국가의 모습을 갖고 등장한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이 왜 권력을 세습하는 봉건 왕조국가의 모습으로 퇴화하는 지를 설명해주는 부분이다. 반면 동치중흥(同治中興)과 양무(洋務) 운동과 같은 자강(自强) 노력이 실패했던 청은 넓은 대륙의 영토를 제국주의 열강에 의해서 부분 부분이 침탈당하는 방식으로 주권을 상실해 갔다. 그런데 이 과정에서 조선과는 다르게 드넓은 영토 내부의 어딘 가에서 반외세·반봉건의 근대적 정치운동이 숨을 쉬고 싹을 틔울 수 있는 공간은 존재했다. 청일전쟁 패배로 좌절했지만, 무술변법과 의화단 운동 등 열강의 침략에 대응하는 민족주의 열기는 고조되었다. 청제국은 마침내 1911년 신해혁명으로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이제 중국대륙은 중앙의 구심력을 상실하고, 이권쟁탈을 위해 경쟁하는 열강들과 조각조각 찢어져서 세력확장에 몰두하는 군벌 세력들 간의 각축장으로 전락했다. 5.4 운동으로 대변되는 지적이고 문화적인 각성에 힘입어 새로운 근대국가를 열망하려는 중국 내부의 열망은 국민당과 공산당이라는 두 정치세력으로 수렴되어 갔다. 이 과정에서 수많은 중국 인민들의 삶은 만인과 만인의 투쟁 속으로 휩쓸렸다. 자신의 생명과 안전을 두 정당 간의 경쟁과 만주사변(1930)과 중일전쟁(1937)으로 가속화되는 일본의 침략 속에서 어딘가에 의탁해야 하는 각자도생의 길위로 내몰리게 되었다. 결국 제2차 세계대전으로 패망한 일본이 물러가고, 국민당과 4년간의 내전에서 승리한 공산당이 사회주의 체제 국가인 중화민주주의 인민공화국을 중국대륙에 수립함으로써 백여년 간 이어진 근대국가로의 이행을 완수하게 된다.
제2차 세계대전 후 한국전쟁을 거치며 동아시아의 냉전은 더욱 가속화된다. 임진왜란 시에 중국(明제국)이 군대를 파병했던 것과 유사한 전략적 고려에서 마오쩌둥은 전략적 완충지대(strategic buffer zone)로써 미국의 반공전선에 대항하는 북한지역 상실을 우려했기에 한국전쟁에 참전했다. 중국의 한국전쟁 참전은 양극체제로 구조화된 냉전체제로의 역사 경로로 귀결되었다. 한국전쟁 휴전 직후 한국은 미국과의 한미상호방위조약을 체결함으로써 냉전구조의 남방 삼각관계 한 축을 완성했다. 반면 북한은 소련 및 중국과 우호조약의 형태로 북방 삼각관계의 한 축을 완성했다. 안보를 제공받고 자율성을 제약당하는 이 비대칭 동맹조약의 형태가 한미관계에서는 지속되었고, 한국은 이를 바탕으로 고도 경제성장과 종합국력을 증대시킬 수 있었다. 반면 탈냉전 이후 중국과 소련의 지원이 빠져나간 자리에 북한은 고립되었고, 사회주의 계획경제의 빈곤 속으로 내몰렸다. 결국 북한은 중국과 소련의 동맹 방기(abandonment)의 위험 그리고 국제사회로부터의 경제적 고립 속에서 ‘고난의 행군’을 겪으며 핵개발을 통해서 독자적인 생존을 모색할 수밖에 없었다. 반면 중국은 자국의 경제발전을 위해 안정적인 한반도 정세를 관리할 필요가 있었다. 덩샤오핑의 개혁개방정책은 2개의 한반도 정책을 추진했고, 이는 당시 노태우 정부의 북방정책과 결합되어 1992년 한중 수교로 이어진다.
한중수교에 따른 한중관계는 그 출발지점부터 ‘정냉경열(政冷經熱)’의 속성을 갖고 있었다. 동아시아의 냉전구조가 한중수교와 미중수교(1979년)로만 일부 해체되고, 북미관계와 남북관계는 변화없이 지속되었기 때문이다. 한중관계은 정치·군사 관계의 발전은 제약되고 경제·사회문화 관계를 중심으로 비약적으로 성장했다. 경제적인 측면에서 보면, 중국은 현재 한국의 최대 교역대상국이자 수출대상국이며 또한 최대 투자대상국이 되었다. 수교 당시 50억 달러의 무역규모에서 2020년 2,400억 달러로 급성장해서 한국의 일본과 미국과의 무역액을 합친 규모를 넘어섰다. 양국은 연간 약 10여 차례의 경제각료회의를 개최하고 있다. 또한 양국 교류의 정도를 가늠하는 항공편수는 팬더믹 이전 매주 400회 이상의 항공편이 운항되었다. 약 8만여 명의 한국 학생이 중국에서 유학하고 있으며, 반대로 약 7만여 명의 중국 학생이 한국에서 공부하고 있다. 황해를 마주하고 약 130여개의 자매도시가 활발히 교류하고 있다. 한류 열풍은 중국 내에서 한국의 문화를 알리고 한국기업들의 시장 진출에 기여하고 있으며, 중국은 한국에 약 17개의 공자학원을 설립하여 유교문명권의 부활시켜 자국의 영향력을 확대하고자 한다.
한중 관계의 공식적인 명칭도 양국 교류와 협력의 질적인 비약에 따라 바뀌었다. 수교 이후 ‘우호 협력 관계’에서 1998년 김대중 정부 시 ‘협력 동반자 관계, 2003년 노무현 정부 시 ‘전면적 협력 동반자 관계’를 거쳐 2008년 ‘전략적 협력 동반자 관계’로 격상되었다. 한중 양국은 경제, 통상, 문화 등 많은 분야에서 전면적이고 실질적인 발전을 이룩하여 왔으나, 2000년의 마늘파동, 2004년과 2006년의 중국 동북공정, 2016년 사드배치 등과 관련하여 양국 간의 중대한 위기가 발생하기도 하였다. 한국 내의 반(反)중국 감정과 중국 내 반(反)한 감정이 양국의 발전과정에서 부정적인 국민감정을 양산하기도 했다. 그러나 한자와 유교 문명을 공통 기반으로 하는 양국의 지속적 발전 잠재성은 무한하다. 다만 서로 다른 정치체제와 이념이 양국 간의 이해를 심화시키는 데 제약으로 작용한다. 특히 국제사회의 리더십을 둘러싼 미중 간의 패권 경쟁과 갈등이 하나의 심대한 구조를 형성할 때, 미국으로부터 동맹국으로서의 역할을 요구받는 한국의 행동 반경은 상당히 제약될 수 밖에 없다. 한중관계가 미중관계의 단순 종속물이 될 우려가 깊어진다. 한국과 중국 그리고 이 관계를 제약하는 미중 경쟁 구조의 틀을 바꾸는 게임 체인저는 북한 변수이다. 70년 간 지속된 한반도 냉전구조가 탈냉전 시대에도 부분적으로 지속되었던 가장 큰 요인이 북한의 고립이었기 때문이다. 결국 북핵문제를 중심 아젠더로 하는 북미관계의 전환과 남북관계의 진전이 이루어질 때, 한중관계는 거시적이고 구조적인 이해관계 조정의 계기를 얻을 것이다. 이 새로운 역사가 제공하는 기회의 창을 활용할 때에야 한중관계는 지난 30년 간 축적된 자양분을 바탕으로 새로운 단계로 도약할 수 있으리라 전망된다.

부산대학교 정치외교학과 차창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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