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인 단체 관광객이 중국 상해를 여행할 때 단골 방문지의 하나가 대한민국 임시정부 유지일 것이다. 상해 임정으로부터 불과 수백 미터 떨어진 곳에 신천지라고 불리는 고급 카페와 식당 거리가 있는데, 그 한 가운데 중국공산당 제1차 전국대표회의가 열린 이른바 ‘중공 일대’ 유지가 있다. 한국인에게 상해 임정이 각별한 의미를 지니듯이, 중국인에게 중공 일대는 중국공산당 창당을 알리는 상징성을 가진다. 그런데 상해 임정과 중공 일대가 이렇듯 지척의 거리에 있었던 것은 우연의 일치일까? 그렇지 않다. 두 장소 모두 과거 상해 프랑스 조계지 안에 위치하는데, 그곳은 정치적 망명객과 혁명가들이 비교적 안전하게 활동할 수 있었던 공간이었다. 프랑스 조계지는 상해 안에서도 공기가 자유로운 지역이었다. 그래서 자연스럽게 중국인 혁명가들과 한인(韓人) 망명객들 사이에 활발한 교류가 이루어졌다. 올해 중국공산당 창당 백 주년을 맞이해 잠시 과거의 그곳으로 돌아가 보자.
동아시아 공산주의 운동은 국제적인 운동이었다. 따라서 중국이든 한국이든 혹은 일본이든 공산주의 운동을 동아시아적 시각에서 바라볼 필요가 있다. 자국 공산주의 운동에만 집착하면 역사 왜곡 현상이 나타날 수 있다. 중국 공산주의 운동과 재상해 한인 사회주의 운동에서 중국인과 한인은 물론, 다양한 국적의 운동가들이 서로 활발하게 교류한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특히 러시아 공산당과 코민테른의 영향은 무척 중요하였다.
왕약비(王若飛)는 1943년 연안의 보고에서, “1919년 코민테른에서 사람을 파견해 중국으로 왔다. 처음은 소련의 화아(華俄)통신사 사장이며, 그 후 고려인 파극경춘(巴克京春)이 중국에 와서 당을 조직했다.”라고 썼다. 곧이어 “당시 상해에는 황개민(黃介民) 일파가 있었고 진독수(陳獨秀)를 만났으며, 광주에서는 구성백(區聲白), 황릉상(黃凌霜)을 찾았다.”라고 했다. 중국학자의 고증에 따르면, 전자는 호도로프(A. E. Hodorov) 일행으로 추측하는데, 그들은 상해 말고도 천진, 광주 등지에 통신사 분사를 설치하였다. 후자인 ‘파극경춘’은 한인 박진순(朴鎭淳)으로, 코민테른 전권위원의 자격으로 중국에 와서 중국공산당 창당 활동에 종사했다고 한다. 이 보고는 “이동휘와 박진순의 한인사회당이 황씨(황개민) 성을 가진 중국인에게 2만 원(또는 1만 2천 원)을 제공해 중국 건당을 도왔다.”라는 주장과 결합해 볼 때, 코민테른과 중국 초기 공산주의자와의 접촉 과정에서 한인 사회주의자와 재상해 한인 독립운동가들이 중요한 교량 역할을 했음을 암시한다. 실제로 재상해 한인 공산주의 운동과 중국 공산주의 운동은 동시에 진행되었다.
한인 사회주의자들의 역할을 파악하기 위해 먼저 기억할 사실은, 중국공산당 창당 과정에서 여러 개의 공산당이 존재했다는 점이다. 널리 알려진 진독수, 이대조(李大釗) 중심의 중공 상해발기조 말고도 황개민, 요작빈(姚作賓) 중심의 대동당(大同黨, 혹은 東方共産黨)과 장묵지(張墨池), 강반약(姜般若) 중심의 지나공산당(支那共産黨) 등이 그것이다. 그런데 위에서 언급한 박진순이 주로 접촉한 인물이 진독수 계열보다는 황개민, 구성백, 황릉상 등과 같은 아나키스트였다는 사실은 흥미롭다.
보이틴스키(G. N. Voitinsky) 일행을 파견했던 러시아 공산당 블라디보스토크분회 책임자인 웨렌스키-시베리아코프(V. D. Vilensky-Sibiryakov)는 중국 상황을 고찰한 뒤, 1920년 말 모스크바에서 행한 「중국공산당의 성립 전야」에서 중국의 혁명 조직을 설명하면서 진독수의 중공 말고도 특별히 두 개의 단체를 언급하였다. 하나는 진형명(陳炯明)이 우두머리인 진리사(眞理社)이고, 다른 하나는 대동당이다. 그는 대동당이 중국인은 물론 다양한 외국인도 참여한 사회당 또는 국제사회당이라면서 현재 공산주의 사상이 이 조직에 침투하고 있다고 소개했다. 대동당은 코민테른의 지원 아래 만들어지기에 동방공산당이라고도 부른다. 그리고 진리사는 복건성 장주를 배경으로 출발한 아나키즘 성격의 혁명 단체로서 지나공산당의 전신이었다.
중국학계에서는 진독수의 공산주의 그룹을 정통 공산당이라며 대동당과 지나공산당 등을 가짜 공산당으로 폄하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일반인들은 그 존재조차 모르고 있다. 하지만 북방의 이대조와 남방의 진독수가 서로 약속해서 중국공산당을 만들었다는 기존 시각에는 문제가 있으며, 여전히 관건은 러시아 공산당 및 코민테른의 영향력이었다. 이때 볼셰비키의 방침을 전달한 사람은 소비에트 러시아에서 파견한 밀사와 중국에 거주하던 러시아 혁명가들의 활동이 1차적으로 중요하지만, 한인 사회주의자들의 교량 역할도 주목해야 한다. 여기서는 러시아 공산당에서 파견한 김만겸(金萬謙)과 코민테른에서 파견한 박진순에 관해 간단히 소개하겠다.
러시아혁명 직후인 1919년 초부터 1920년 초까지 1년 동안 러시아 혁명가와 한인 독립운동가 사이에 꾸준한 접촉이 있었다. 자료를 살펴보면, 리제로비치, 포포프, 아가레프, 포타포프 등과 같은 러시아의 급진주의자와 상해 임정의 여운형, 이광수, 박은식 등 한인 독립운동가의 친밀한 관계를 확인할 수 있다. 이것은 러시아혁명과 3·1운동의 여파로 상해를 중심으로 양국 혁명가들이 결집하면서 나타난 현상으로 보인다. 곧이어 러시아 공산당의 밀사가 중국에 파견되고 연해주 지역에 있던 한인사회당의 본부가 상해로 이전하면서 이들 사이에 접촉이 더욱 활발해지고, 나아가 중국공산당의 창당에 영향을 미치게 된다.
우선 러시아 공산당에서 파견한 보이틴스키 일행 가운데 한 사람인 김만겸이란 인물을 주목할 만하다. 김만겸은 러시아 연해주에 장기 거주하던 한인 이주민 2세로 전통적인 한학 교육과 러시아 중등교육을 이수한 지식인이었다. 그는 ‘김’이나 ‘시리포리야코프’라는 이름으로 나타난다. 김만겸은 1920년 초부터 그해 말까지 보이틴스키 일행과 동행해 중공 상해발기조의 성립 과정에 참여했으며, 상해 임정 안의 한인사회당원과 교류하였다. 그 과정에서 ‘혁명국’이라는 조직을 만들었다. 한편 일본 사회주의 운동을 활성화하고자 아나키스트 오스키 사카에(大杉榮)를 상해로 초빙하거나, 이춘숙과 이증림 등을 일본 현지에 파견하기도 했다. 여기서 흥미로운 점은 보이틴스키 일행의 보고에는 이른바 상해파 (한인)공산당의 활동이 코민테른 (임시)동아서기처 산하 혁명국 내 조선부의 활동으로 나타난다는 사실이다. 게다가 진독수의 중공 상해발기조의 활동 역시 혁명국의 중국부와 거의 동일한 활동으로 기록하였다.
다음으로 중국공산당의 다른 하나인 동방공산당의 성립 과정은 1920년 말 상해에 온 코민테른 사자 박진순을 중심으로 살펴볼 수 있다. 박진순은 진독수의 중공 상해발기조보다 주로 대동당(동방공산당)과 지나공산당과 같은 아나키즘 색채가 강한 사회주의 그룹을 지원하였다. 그는 개인 관계에 기초해 한인사회당을 고려공산당으로 개조하는 과정에서 김만겸과 갈등을 일으켰으며, 보이틴스키가 추구한 것과는 다른 ‘동아총국’을 건설하려 했다. 이 양자의 활동은 서로 얽혀 있으며, 상해 임정 내 한인사회당 지도자(이동휘, 김립 등)와 깊은 관련이 있었다. 박진순은 코민테른 제2차 대회에 조선 대표로 참석해 레닌과 면담한 바 있으며, 코민테른 집행위원회 위원이자 극동 대표로 선출된 인물이다. 코민테른 역사상 박진순보다 더 높은 직위에 오른 한인 혁명가는 없었다.
이처럼 한인 사회주의자들은 러시아 공산당과 코민테른이 중국 공산주의 운동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교량 작용을 하였다. 그 이유는 한국과 중국은 이웃 나라로서 적지 않은 한인들이 중국에 거주하거나 왕래했으며, 문화적으로도 가까웠기 때문이다. 게다가 재러시아 한인들은 러시아혁명에 영향을 받아 일찍부터 한인사회당을 만들어 김만겸이나 박진순처럼 볼셰비키 사업에 투신하였다. 이 두 사람은 러시아 공산당과 코민테른 조직에 직접 가담함으로써, 동아시아적 감각을 가진 공산주의자가 되었다. 지면 관계상 소개에 한계가 있지만, 상해 임정의 이동휘, 여운형, 김가봉, 이춘숙, 이증림, 한형권, 김립 등과 같은 한인 사회주의자들의 노력이 한인사회당의 개조는 물론, 중국공산당(또는 대동당이나 지나공산당)의 창립에 비록 짧은 기간이나마 ‘일정한’ 도움을 주었다. 그들은 러시아 공산당이나 코민테른의 자금을 활용해 중국에 당을 조직하는데 관련을 맺었으며, 일본을 비롯한 동아시아 여러 지역의 연락책을 담당하였다.
코민테른 제3차 대회(1921년)에 중국의 ‘공산당’ 명의로, 또는 자칭 ‘사회당’을 대표한다는 명분으로 참가한 조직은 적어도 5개 이상이었다. 진독수의 중국공산당은 코민테른 제4차 대회(1922년)에 가서야 비로소 중국을 대표하는 공산당으로 가입 허가를 받았다. 따라서 중공 상해발기조 중심의 중국공산당 창당 신화는 어느 정도 수정되어야 하며, 대동당이나 지나공산당과 같은 또 다른 공산당의 움직임에도 주목해야 할 필요가 있다. 기존 ‘정통’과 ‘가짜’ 공산당으로 나누어 접근하는 방식은 별로 타당성이 없어 보이는데, 이런 일국사 중심의 기술 방식에서 나타나는 연구의 편향성을 메우도록 노력해야 한다. 왜냐하면 승자 위주의 역사상을 수정해야만 중국 현대사가 중국공산당사에 종속되어 역사 왜곡 현상을 일으키는 오류에서 벗어날 수 있기 때문이다.
주지하듯이, 최근 중국 정부는 개혁개방 이후의 경제적, 군사적 성과를 바탕으로 상당히 권위주의적이며 애국주의적인 색채를 드러내고 있다. 하지만 백 년 전 중국공산당 창당 시기를 돌이켜보면, 그 출발점은 국제 연대의 정신 아래 동아시아 급진주의자들의 교류 속에 공산당이 창당된 사실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게다가 신문화운동의 반전통주의적 격랑 속에서 공자를 박물관으로 보내며 탄생한 중국공산당이 오늘날 이념 위기에 직면하자 다시 박물관에 있던 공자를 불러내어 대체 이념으로 국수주의를 활용하고 있는 현실을 바라보자면 마음이 심란해지는 것을 어쩔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