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를 통틀어, 다양한 문명들은 스스로 세계의 중심이라고 생각하였고, ‘질서’에 대한 다양한 개념을 정의했으며, 그들의 원칙이 세계적으로 타당하다고 여겼다. 다만, 질서는 국가 간의 평형을 통해서가 아니라 그들의 내부 통치에 의하여 확립되었다는 점을 알아둘 필요가 있다.
즉, 중앙의 권위가 응집력을 발휘할 때는 평화로운 상태가 지속될 수 있지만, 약한 권위 아래 에서는 많은 문제가 생겨났다. 평화는 곧 권력의 영향력에 따라 결정되었다. 즉, 질서의 권위는 특정 질서를 확립시키고, 안정시키며, 실행할 수 있게 해주는 전제조건이라고 할 수 있다.
질서는 균형의 메커니즘을 통해 달성되기에 현실주의의 관점에서 권위와 질서는 곧 실제 역량과 깊은 관련이 있다. 어떠한 요소가 등장하여 그 요소가 질서의 토대를 제거하거나 권위에 균열이 생기게 한다면 권위는 빠르게 감소한다.
지금 21세기와 마찬가지로 19세기 역시 각국의 이해관계와 세력의 균형 속에 요동치고 있었다. 조선과 청나라 역시 변화되어 가는 국제관계 속에 변화를 맞이하였다. 동아시아에서 청조(淸朝)를 중심으로 하는 전통 시기의 책봉·조공관계(朝貢關係)는 19세기 말에 이르면 근대 국가와 주권을 바탕으로 한 근대적 조약 관계로 전환된다. 특히 1894년 청일전쟁에서 청조가 패배하기 직전까지 청은 다른 서구의 국가들과는 조약 관계를 유지하는 한편, 조선에 대해서는 전통적인 조공관계를 강요한 양면성을 띄고 있었다.
청은 실리적 차원 및 상국(上國)의 체면, 즉 국제적 영향력 등 현실적인 문제를 고려하여 근대적 조약관계와 전통적 조공관계를 병립시키려 하였다. 또한 이는 청의 조선 인식이 가진 양면성을 반영한 것이기며, 일종의 편향적이고도 제한적인 간섭정책의 성격도 내포하고 있다.
가와시마 신과 권혁수와 같은 연구자들은 당시 조청 관계의 모순을 “이중기준(Double Standard)” 혹은 “한 체제, 두 외교”라고 표현하기도 한다. 조선과의 관계에서 타국의 간섭을 받지 않고 우월적인 지위를 유지하고자, 당시 청조의 실권자인 이홍장(李鴻章)은 조선을 무조건 보호하려는 것 보다는 조선과 타국 간의 외교관계를 윤허하면서 세력의 균형을 유지하는 것이 유리하다고 판단하였다. 다만, 지금의 관점과 해석과는 달리 이러한 과도기 혹은 모순적 이라고 할 수 있는 체제는 청과 조선 모두가 의도했던 결과는 아니라는 점이다.
청조 내부로 눈을 돌려 보면, 사실 청 조정의 모든 관원들이 이홍장의 구상에 찬성했던 것은 아니었다. 청조 내부의 정치 집단들은 자신들의 이권과 입지를 위해, 내부뿐만 아니라 대외정책에서도 영향력을 피력하고자 기회를 노리고 있었다. 특히 조선과의 변경을 맞대고 있는 봉천과 길림 등지의 지방장군은 자신들의 입지를 유지하고 통상의 빌미로 북양아문의 영향력이 자신들의 관할지역에 미치는 것을 막기 위해 명목상 조선과 기존 관계를 유지하려고 하였 다. 이들은 이홍장과 북양아문의 정책에 반대하였으며, 특히 통상무역의 개정을 둘러싸고 정치적인 갈등이 표면으로 드러나게 된다.
1882년 조청 양국은 청 북양아문의 주도하에 《조청상민수륙무역장정(이하 “무역장정”)》을 협의하고, 인천 등 조선의 주요 항구에 해관을 설치하였다. 또한 청에서 파견한 상무위원이 서울 등지의 항구에 상주하면서 해관을 통한 통상 사무를 관장하였다. 다른 한편, 청의 지방 장군은 중강 등지에서 정기적으로 시행되고 있던 호시(互市) 무역의 개정에 관여하였다. 당시 무역으로 인한 관세 수입 등으로 당시 재정난을 해결하고자 고종은 어윤중을 서북경략사(西北 經略使)로 임명하여, 봉천지역으로 파견하여 정기적인 호시를 수시무역으로 개정하고자 하였다. 청의 지방장군 측도 동변병비도(東邊兵備道) 진본식(陳本植)을 대표로 보내 어윤중과의 협상에 임하게 하였다. 1883년 2월부터 4월까지 양국 대표는 중강(中江) 등지에서 협상을 진행 하였으며, 어윤중은 기존의 관례를 고수하려는 진본식 등과 수시무역과 관원의 파견 및 권한 등을 두고 열띤 논쟁을 벌였다. 그 결과, 조청 양국은 《봉천여조선변민교역장정(이하 “봉천장 정”)》과 《길림여조선변민교역장정》을 최종 협의할 수 있었다.
조선과 청 사이의 세 장정을 자세히 살펴보면, 《무역장정》은 북양아문이 주도로 해로해관무 역을 새로이 협의한 장정이라고 할 수 있다. 반면 《봉천장정》은 육로호시무역의 개정을 두고 조선과 청 지방장군 측이 협의한 장정으로 구분할 수 있다. 각 장정의 조관을 살펴보면, 우선 양국 관원의 대우와 문서 행정 등에 관해 “평행상대(平行相對)”를 원칙으로 할 것 등을 명시한 《무역장정》과 달리 《봉천장정》에서는 조선 관원이 청측에 문서를 발송할 때, 반드시 청을 “상국(上國)”, “천조(天朝)” 등으로 지칭하도록 특별히 명시해두는 등 차이를 확인할 수 있다.
이밖에도 다양한 기록을 통해 19세기 후반 청의 조선정책이 가진 이중성은 당시 청 조정 내부에 북양아문과 예부, 지방장군 등의 길항 관계가 영향을 주면서 형성되었다는 점을 확인할수 있다. 조청관계의 과도기 혹은 모순적인 형태는 청일전쟁을 계기로 조청 양국 관계가 단절 되면서 모습을 감추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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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북경략사 어윤중.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한편, 당시 동아시아 세력 균형의 실체를 좀 더 깊이 이해하기 위해, 1894년 청일전쟁 이후 대만 할양의 사례도 참고해 볼 필요가 있다. 1895년 시모노세키 조약으로 대만과 요동의 할양이 결정된다. 당시 대만순무(臺灣巡撫) 당경숭(唐景崧)은 처음에 영국에 협조를 구해 대만을 영국의 보호 아래 두어 할양을 피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영국과의 협상이 무산되자, 대만 민주국을 세워 일본에 대만을 넘기지 않으려고 하였다. 장지동(張之洞) 역시 이홍장과 북양아문을 비판하며, 남양을 중심으로 한 해역방어의 강화 등 시무책도 함께 건의하면서, 서구국가와의 교섭을 통한 원교근공의 방안을 내세웠다. 당시 청 조정 내에서 남양의 문호로 대만이 중요하게 인식되고 있었다는 점을 고려한다면 남양아문의 책임자인 장지동에게 있어서도 대만은 잃어서는 안되는 곳이었다.
적극적인 항전을 주장하는 당경숭과는 달리 허경징(許景澄)과 같은 조정 관료는 대만의 저항으로 인해 일본과의 강화 교섭이 진전을 보이지 않고 있다는 점을 지적하였다. 이에 청 조정은 당경숭과 대만 민주국의 저항은 일본과의 강화를 어렵게 할 수 있고 다시 청 본토에서 전쟁이 재개될 수 있으므로 어떠한 지원도 해주지 않았다.
또한 이홍장은 대만의 할양과 대만 민주국을 내세워 대만을 보위하겠다는 당경숭의 주장과 관련하여, 데트링(德璀琳, Detring Gustav von)이 보내온 독일 측의 입장을 언급하며, 은밀히 대만 신민으로 하여금 항거하게 하는 방안은 조약에 위배 되는 것이고, 독일이나 러시아도 협조하지 않을 것이라는 뜻을 전달하였다. 또한 이홍장은 만약 대만 민주국을 지원하는 일이 일본 측에 누설이라도 된다면, 일본이 반드시 무력으로 보복할 것이라는 점을 들어 대만 민주 국에 대한 지원을 반대하였다. 아울러, 남양아문과 당경숭이 조약의 위반을 부추기고 있다는 점도 지적하였다. 결국, 대만의 할양에 대한 서구국가들의 비협조적인 태도, 그리고 내부 입장의 차이로 청 조정이 대만 민주국을 지원하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일이 되었다.
한편, 할양 직전 대만 현지의 상황을 보면, 당경숭은 대만 해역 부근에 접근하고 있는 일본 함대의 동향 등을 청 조정 측에 시시각각 보고하면서, 장지동과 함께 일본함대의 허실을 잘알고 있으니 함대를 보내 격퇴하자고 조정에 건의하기도 하였다. 프랑스와의 접촉까지 결국 무산되는 상황에서 1985년 6월 당경숭은 청 조정에 전보를 보내 대만 신민의 민심에 따라 대만 민주국의 총통에 오를 것임을 밝힌다. 대만 민주국을 건국함으로써 청에 충성하고 일본에게 대만이 할양되는 상황을 막겠다는 뜻을 청 조정에 전한 것이다.
아울러 할양 소식은 청 조정뿐만 아니라 대만 현지 사회까지 어수선한 상황으로 만들었다.
대만 현지의 관료와 신민(紳民)들도 대만의 할양에 극렬히 반대하면서 "대만이 왜(倭, 일본)에 속하게 되니 만민이 불복합니다...마치 어린아이가 부모를 잃는 것과 같으니 비참함이 어찌 다하겠습니까!(臺灣屬倭, 萬民不服...如赤子之失父母, 悲慘曷極)"라며 일본에 대항해야 한다는 목소리도 높이고 있었다. 당경숭은 형세의 불리함 속에서도 의용군을 모아 마지막까지 대만을 보위하려고 하였으며, 민심이 동요되는 와중에도 혈서까지 조정에 보내는 등 저항의 뜻을 피력하였다. 또한 당경숭은 청 조정의 지원을 기대하기 어려운 상황이 되자 독일, 프랑스 등 서구국가의 힘을 빌리고자 하였으나 이들에게 외면받았다.
결국 1895년 5월 25일 당경송은 대만 민주국의 건립을 공식적으로 선포하고, 민주국의 총통직에 오른다. 곧이어 6월 3일, 일본 군대가 대만 영내로 진입하여 기륭(基隆)항을 점령한다.
급조한 대만 민주국의 병사들이 각지에서 일본군에 대항하였으나 중과부적으로 패퇴를 거듭하 였다. 일본군은 파죽지세로 대북(臺北)을 향해 진격하였고, 대북에 입성한 이후 중요도시들이 차례대로 일본군에 의해 점령되었다. 형세의 불리함이 더 이상 돌이킬 수 없는 지경에 이르자 10월 20일 당경숭을 비롯한 대만 민주국의 주요 인사들은 독일 상선을 통해 대만을 탈출한 다. 이후 대만 각지에서 산발적인 저항이 있었지만, 대만 민주국은 건립된 지 반년도 채 되지 않아 역사 속으로 사라진 나라가 되었다.
러시아는 이른바 삼국간섭에 주도적인 역할을 하면서 왜 일본에 할양하기로 한 요동(遼東) 반도를 청에 반환하는 일을 자임하였다. 다만 대만의 할양에 대해 왜 러시아는 잠자코 있었을 까? 우리는 대만과 요동에 대한 러시아, 독일 등 서구국가의 극명한 태도 차이에 대해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대만의 할양을 두고 조약을 위배한다는 이유로 협조를 거부했던 러시아는 이후 자국의 이권과 관련된 요동의 반환에는 적극적으로 나서면서 대만의 사례와는 상반된 태도를 보여주었다. 요동 역시 조약으로 할양이 정해져 있음에도 불구하고 러시아는 요동의 반환에 적극적으로 반대하였으며, 여기에 독일 등 국가도 자국의 이익을 위해 러시아에 동조하였 다. 그 결과, 요동의 할양이 무산되자 러시아는 여순과 대련을, 독일은 위해위를 청에 요구하 였다. 러시아는 삼국간섭을 통해 일시적으로 청 조정의 신임을 얻었으나, 청에 대가를 요구하 면서 본래 목적이 무엇이었는지를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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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igita Toshihide - The Imperial Guard Defeats the Enemy in Hard Fighting at Jilong on the Island of Taiwan, The Patricia & Phillip Frost Art Museum Collection.
국립대만대학 역사학과 Ph.D Candidate 김봉준
- 王彦威 纂輯, 王亮 編, 淸季外交史料, 湖南师范大学出版社, 2015.
- 권석봉, 淸末對朝鮮政策硏究, 일조각, 1986.
- 권혁수, 19세기말 한중 관계사 연구, 백산자료원, 2000.
- 김용구, 세계관 충돌과 한말 외교사: 1866~1882, 문학과지성사, 20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