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중국이 ‘홍콩 국가보안법’을 제정하면서 홍콩의 상황에 대한 국제사회의 관심이 주목되고 있다. 지난 5월 28일 전국인민대표대회에서 결의되고 6월 30일 전인대상무위원회를 거쳐
속전속결로 제정된 이 법은 이튿날인 7월 1일 시행에 들어갔다. 1997년 7월 1일, 홍콩이 중국에 반환되고 ‘일국양제(一國兩制)’ 안에서 50년 간 기존의 생활방식과 제도를
유지한다는 약속을 홍콩 ‘기본법(제5조)’에 명시한지 23년 만이다. 지난해 3월에 시작된 ‘범죄인 인도법(송환법)’ 반대시위가 장기화되며 100만 명이 넘는 시민들이 참여한 대규모
시위로 이어이지고, 송환법에 대한 공식 철회 선언이 있은 후에도 시위열기가 사그라지지 않자 중국이 초강수를 둔 것이다. 시위에 참여한 홍콩인들은 ‘일국양제’의 원칙에 따라 고도자치권
보장을 요구하고 있지만 중국 당국은 줄곧 ‘일국양제’의 원칙에서 중요한 것은 ‘두 체제’의 유지가 아니라 ‘하나의 나라’가 되기 위한 노력이라 주장해왔다. 그리고 이제 본격적으로
홍콩에 대한 전면적 관활권을 요구할 가능성이 높아진 것이다.
일각에서는 이로써 ‘일국양제’는 종언을 맞았다는 우려가 나오고 있다. 어쩌면 이것은 예견된 갈등이다. 애초에 ‘일국양제’에 담긴 약속에는 ‘50년’이라는 기한이 있었고 약속의 날이
다가오면 홍콩사회는 어떤 방식이든 또 한 번 변혁을 맞아야 했다. 아편전쟁으로 시작된 중국의 굴욕적 근대의 상징에서 영국의 지배 아래 아시아 최고무역항이자 글로벌금융도시로 성장하고,
반환 이후 다시 중국 특별행정구로 거듭난 남방 끝자락의 이 작은 지역은 오늘날 ‘위대한 민족 부흥’을 꿈꾸며 세계 권력의 중심이 되고자 하는 중국의 최대 정치적 요충지가 되었다.
굴곡진 역사를 거쳐 온 홍콩이 또 한 번 크게 흔들리고 있다.
이러한 홍콩의 상황과 맞물려 다시 회자되는 영화가 있다. 바로 <중경삼림(重慶森林, 1994)>이다. 우리나라에서는 1995년에 개봉하여 많은 청춘들의 마음을 사로잡고
‘왕가위(웡카와이(王家衛)열풍’을 일으키기도 했던 이 영화는 사랑과 이별, 약속과 기다림에 관한 독특한 표현 방식만으로도 충분히 매력적인 영화이지만 반환을 불과 3년 앞둔 시점에서
당시 홍콩의 정서를 잘 표현한 작품으로 평가된다.
영화는 두 개의 에피소드로 구성된다. 여자 친구로부터 갑작스레 이별통보를 받은 경찰 233의 내레이션이 이끌어가는 첫 번째 에피소드에는 그 유명한 대사 “이 세상에 유통기한이
없는 것은 없을까?”, “기억이 통조림에 들었다면 ... 유통기한을 만년 후로 적어야지.”가 등장한다. 하필이면 만우절에 이별통보를 받은 남자는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5월 1일이 유통기한인 파인애플 통조림을 사 모으면서 한 달 동안 여자 친구의 연락을 기다려보기로 한다.
두 번째 에피소드의 경찰 663도 갑작스런 이별을 맞았다. 승무원인 여자 친구는 “당신의 좌석이 취소되었다.”는 짧은 메시지와 함께 집 열쇠를 남자의 단골
샌드위치가게에 맡기고 떠나버렸다. 남자는 편지와 열쇠를 그대로 맡겨 두는 것으로 이별에서 한 발짝 물러나 남 일처럼 미뤄버린다. 가게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며 남자를 짝사랑하던 페이는
이 열쇠를 가지고 남자가 없는 사이 집안을 청소하고 물건들을 바꿔놓는다. 남자의 방에서 옛 여자 친구의 흔적을 지우고 자신의 흔적을 채워 넣는 것이다. 영화에서
량차오웨이(梁朝偉)의 집은 홍콩 센트럴의 ‘미드레벨 에스컬레이터’가 지나는 길가에 있다. 산지가 많아 오르막길을 빙빙 돌아야만 했던 이 지역에 직선으로 운행하는 세계 최장의 옥외
에스컬레이터가 건설된 것이다. 당시 막 완공된 이 에스컬레이터는 <중경삼림>과 함께 센트럴 최고의 명소가 되었다. 영화를 본 사람이라면 남자의 집 창가에 숨어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올라가는 량차오웨이(梁朝偉)를 몰래 바라보던 왕페이(王菲)의 장난스런 얼굴이 떠오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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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콩 센트럴의 명소가 된 ‘미드레벨 에스컬레이터’
영화는 90년대 홍콩 거리 곳곳을 배경으로 하고 있어 홍콩을 잘 아는 사람에게는 진한 향수를 느끼게 하고, 또 가보지 않은 사람에게는 하나의 가이드북이 되기도 한다. 오늘날까지 홍콩의
‘가장 위대한 홍보대사’라는 말이 나올 정도이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이 영화가 오랫동안 회자되는 것은 반환 직전의 시대적 정서를 너무나 절묘하게 녹여내고 있기 때문이다. 150년이 넘는 기간 동안 영국의 통치를 받았던 홍콩은
1984년 “중영공동선언”의 발표와 함께 ‘1997년 7월 1일’이라는 유통기한에 의해 지배된다. 기한이 만료되면 영국의 식민지 시절과 작별하고 중화인민공화국의 특별행정구로서 새로
태어나는 것이었다. 홍콩은 기대와 불안으로 흔들렸다. 사람들은 영화 속 인물들처럼 갑작스런 ‘이별통보’를 받고 ‘유통기한’이 정해진 이 도시에서 불안한 일상을 꾸려갔을 것이다.
누군가는 새로운 삶을 적극적으로 찾았을 것이고, 또 누군가는 이미 확정된 변화이지만 한 걸음 뒤로 달아나고 싶기도 했을 것이다.
올 여름 <중경삼림>을 다시 보았다. 특별한 것은 20학번과 함께 보았다는 점이다. 영화를 통해서 중국역사와 문화, 사회적 이슈에 대해 토론하는 수업인데 홍콩문제를 다루며 <중경삼림>
을 거론하게 된 것이다. 지금의 대학생들은 중국 대륙 영화를 접할 기회가 거의 없기 때문에 영화리스트 가운데 <중경삼림>이 그나마 학생들이 친근하게 느낄만한 영화였다.
21세기에 태어난 이 친구들에게 홍콩영화라고 더 친근할 리는 없지만 홍콩영화는 부모님의 추억 영화로 인식하는 경우가 많고, 또 <중경삼림>은 국내에 워낙 팬들이 많다보니 그
제목만큼은 알고 있는 학생들이 많았다. 특히 올해는 현재 홍콩의 상황과 맞물려 영화는 물론 홍콩의 역사적 배경에 대한 관심도 매우 컸다.
여담이지만 20학번과 94년도 영화로 공감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어느 정도 예상은 했지만 호기심을 보였던 많은 학생들이 영화를 보고 나서는 ‘도무지 무슨 말을 하려는지
모르겠다.’며 ‘(인생 영화라는 수많은 인터넷 상의 글들에) 속았다’고 호소하기도 했다. 특히 짝사랑하는 남자의 집에 몰래 찾아가는 페이의 행동에 대해서는 반감을 드러내기도 했다.
아무리 보아도 ‘범죄 행위’라는 생각이 먼저 든다는 것이다. 90년대 왕페이는 영화 속 페이 역할을 너무나도 잘 소화해내었지만 학생들은 배우 (또는 가수)로서 왕페이의 개성에 대해
전혀 알지 못하니 당연한 반응이다. 그저 낯설고 특이한 여자의 이해불가의 행동으로 받아들이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일단 왕페이가 당대 얼마나 대단한 스타였으며 그의 독특한 개성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열광했는가를 열심히 설명해야했다. 그러면서도 티슈에 비행기 티켓을 그려주며 1년 뒤 만남을 기약하는 90년대 감성에 설레어하기도 하고, ‘94년도 영화지만 지금
보아도 전혀 촌스럽지 않다’는 것과 ‘그 시절 량차오웨이는 참 멋있다’는 것에는 모두 공감을 표했다. 결과적으로 영화는 지금은 볼 수 없는 90년대 홍콩의 분위기를 전달하고 동시에
현재 홍콩의 상황을 돌아보게 하는데 있어 충분한 역할을 했다. 덕분에 토론에 참여한 학생들은 ‘일국양제’에 담긴 약속과 기한의 의미를 오래 기억할 것이라고, 2047년 홍콩의 미래에
어떤 변화가 찾아올 지 주목할 것이라는 훈훈한 소감을 남기기도 했다.
그리고 얼마 뒤 6월, 홍콩 국가보안법 제정이 결정된 가운데 간간히 홍콩 시위 보도가 이어지고 있었다. 기억에 남는 것은 홍콩에서 6.4 천안문 추모집회에 불허령이 떨어졌다는
소식이었다. 1989년 베이징에서 민주화를 요구하며 수많은 학생과 시민이 천안문을 가득 매웠을 때 홍콩에서는 이를 지지하기 위한 모금운동이 일어나기도 했다. 그리고 이듬해인
1990년부터 홍콩의 빅토리아 공원에서는 6.4 희생자를 추모하고 진상규명을 요구하는 집회가 열렸다. 지난 30년 동안 한 해도 빠짐없이 이어져온 이 행사는 홍콩의 대표적인
시민운동으로 꼽힌다. 그런데 올해 홍콩 경찰당국이 이를 금지한다는 발표를 한 것이다. 공식적으로는 코로나19 방역을 위한 것이라 발표되었지만 보안법 제정이 임박한 상황에서 대규모
시위가 일어날 것에 대한 부담이 작용했을 것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6월 4일 빅토리아 공원에는 많은 촛불이 밝혀졌고, 공원에 나오지 못한 일부는 온라인으로 집회에 참여하기도 했다.
홍콩 보안법이 제정되면 올해가 마지막 6.4 추모집회가 될 것이라는 우려와 함께 불허령에도 불구하고 공원을 찾은 사람들이 많았다는 것이다.
올해 6월 4일에도 빅토리아 공원에는 촛불이 밝혀졌다.
이러한 움직임의 궁극적 목표는 홍콩의 역사적 경험의 특수성을 인정받고 홍콩인으로서 정체성을 지켜나가는 데 있다고 생각된다. 국가 보안법 시행과 함께 홍콩의 민주인사 절반이 홍콩을
떠났다. 앞으로 얼마나 큰 파급력을 발휘하게 될지 지켜봐야하겠지만 굴곡진 역사와 정치적 갈등을 겪어온 홍콩이 제 자리에서 안정을 찾을 수 있기를 바라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