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0년 전 중국 동북지역의 페스트 대유행과 국제공조
코로나 19(신종 코로나바이러스, WHO 공식 명칭 COVID-19)의 확산세가 쉽게 꺾이지 않고 있다. 지난해 겨울 중국 우한(武漢)에서 발생한 코로나 19는 중국 국내는 물론,
동아시아를 비롯하여 세계 전 지역으로 빠르게 전파되었다. 결국 세계보건기구(WHO)는 지난 3월 11일 사상 세 번째로 코로나 19에 대해 전염병 경보 단계 중 최고 단계인 ‘감염병
세계 유행’, 즉 ‘팬데믹(pandemic)’을 선언했다.
근대 이후 전 지구적 교통수단의 발달, 국가간, 대륙간 사람과 물자의 활발한 이동과 교류는 특정 지역에서 발생한 풍토병의 세계적 대유행을 견인했다. 인도 벵골 지방의 풍토병이었던
콜레라가 유럽으로 전파, 확산된 것은 그 대표적 사례다. 21세기에 들어 발생한 사스(SARS, 중증급성호흡기증후군), 신종 인플루엔자(신종플루), 메르스(중동호흡기증후군), 현재
진행 중인 코로나 19의 경우도 국경과 대륙을 넘어서는 확산 양상을 보이면서 전 세계를 뒤흔들었다. 특히 신종 전염병의 세계적인 대유행이 반복되는 오늘날의 상황은 전염병의 통제와
종식이 한 국가만의 노력으로는 결코 불가능하며 세계 각국의 협력과 공조가 절실하다는 것을 보여준다.
19세기 중엽 유럽에서는 콜레라의 대유행이 계기가 되어 전염병 통제에 대한 세계적 공조가 본격화되었다. 20세기 초 중국에서도 그와 같은 사례를 확인할 수 있다. 당시 중국에서는
동북지역(이른바 만주)을 중심으로 폐페스트가 크게 유행하였고 중국(당시 청조) 정부는 물론, 만주에 이권을 가지고 있던 러시아, 일본 등 열강 역시도 방역에 적극 뛰어들었다.
1910~11년 동북지역 페스트의 대유행과 방역활동
1910년부터 1911년 사이에 중국 동북지역을 중심으로 창궐한 폐페스트는 시베리아로부터 유입된 것이었다. 1910년 10월 만저우리(滿洲里)에서 첫 번째 감염자가 발생한 이후 수개월
만에 동북 전 지역을 포함한 광범위한 지역에서 유행했다. 페스트는 시베리아횡단철도와 연결되는 동청철도(東淸鐵道, 중동철도)를 따라 시베리아로부터 만저우리(滿洲里)로, 치치하얼, 하얼빈
등 만주 북부로, 그리고 창춘(長春), 펑톈(奉天) 등 만주 남부로 확산되었다. 페스트가 단기간에 만주 북부는 물론 만주 남부로 확산되었던 최대 원인은 철도였던 것이다.
아울러 당시 페스트 감염자의 대다수는 산둥성(山東省) 출신의 하층 노동자, 산둥 쿨리였다. 타향에서 하루하루를 힘겹게 살아가던 이들은 허름한 여관의 한 방에 몇 십 명이 같이
거주하였다. 이런 열악한 주거환경에서는 한 사람의 감염자가 발생하면 자연히 집단감염으로 확산되기 마련이었다.
동북지역 철도 연선의 도시를 중심으로 유행, 확산되었던 페스트는 다시 베이징, 톈진, 지난(濟南) 등지로 남하하였다. 페스트의 관내(關內)로의 전파는 춘절(春節, 설)을 맞은 산둥
쿨리의 귀향이 주요하게 작용했다. 페스트는 산둥 쿨리의 이동 경로를 따라 동북지역에서 산둥성까지 전파되는 양상을 보이고 있었다. 게다가 철도가 페스트 확산의 주범으로 인식되자
1911년 1월 중순에는 경봉철도(京奉, 베이징-펑톈)의 검역이, 펑톈-산하이관(山海關) 노선의 2, 3등 객차와 쿨리를 탑승시킨 객차에 대한 검역이 시작되었다. 더욱이 일본이
경영하는 남만주철도에서는 중국인의 승차 자체를 거부했다. 엄격한 철도검역 조치는 산둥 쿨리들이 도보로 이동하는 원인이 되었다. 그 결과 페스트는 철도 연선의 도시로부터 내륙으로, 산둥
쿨리들이 경유하고 중도에 숙박하는 마을로 전파되는 양상을 띠게 되었다. 페스트의 확산을 저지하고자 취한 검역조치가 역으로 페스트가 더 넓은 지역으로 확산되는 결과를 초래했던
것이다.
확실히 산둥 쿨리들의 귀향은 페스트 확산의 변수였다. 1899년 잉커우(營口)에서 유행한 페스트 역시 산둥 쿨리가 중심이었으나 당시 페스트는 잉커우와 그 주변에 한정되었다.
1910~11년 페스트와 비교해 주목되는 점은 산둥 쿨리들의 대규모 이동이 없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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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1> 동청철도
현재 동북지역, 당시 만주는 러시아, 일본을 비롯한 제국주의 열강간의 이권이 충돌하고 교착하는 공간이었다. 따라서 만주 페스트 방역은 청조뿐만 아니라 제국주의 열강의 입장에 서도
중요한 문제였다. 각국은 페스트 방역에서 주도권을 장악하고 그것을 자국의 이권 확장의 계기로 삼겠다는 정치적 셈법을 가지고 있었다. 특히 러시아는 자국 경영의 동청철도 간선과 지선의
교차점인 만주 북부의 하얼빈을 중심으로, 일본은 만주 남부의 만철부속지와 관동주(關東州)를 중심으로 방역의 주도권을 행사하였다. 더욱이 양국은 중국측의 방역 조치를 불신하고 그
문제점을 지적하면서 청 정부 관할 범위 내의 방역에 개입을 시도하였다.
이런 와중에 청 정부는 중앙 정부는 물론 지방 정부 차원에서도 이전과 다른 조직적 방역을 전개하였다. 펑톈, 베이징 등지에서는 방역총국(防疫總局) 등 방역을 주관하는 방역기구가
설치되고 방역법규가 제정되기도 했다. 특히 펑톈에서는 동삼성총독(東三省總督) 시량(錫良, 1853-1917)의 지휘 하에 검사, 격리, 시신의 화장, 소독 등 근대적 방역조치가
취해졌다. 또한 당시 톈진 육군군의학당(陸軍軍醫學堂) 부감독으로 재직 중이던 우롄더(伍連德, 1879-1960)가 페스트 방역의 총책임자로 임명되어 수행한 역할 역시 간과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무엇보다 청 정부가 페스트 방역 대책을 강구하기 위해 세계 각국의 전문가들을 초청해서 국제회의를 개최했다는 것은 가장 주목할 만한 일이다.
펑톈 국제 페스트 회의(International Plague Conference, 1911.4.3. ~ 28)
<그림 2> 우롄더
1911년 4월 3일 중국 펑톈에서 청 정부가 주최하는 첫 번째 국제학술회의가 개최되었다. 회의는 우롄더가 의장을 맡아 주재하였다. 회의의 목적은 당시 중국 만주에서 산둥성에
이르는 지역에서 대유행 중이던 페스트 대책을 논의하고 하루 빨리 치명적인 전염병을 종식시키는 데 있었다.
회의에는 중국, 미국, 영국, 러시아, 프랑스, 일본 등 11개 국가에서 의학전문가, 정부 관원과 각국 영사 등 모두 100여 명이 참가하였다. 청 정부의 외무대신
스자오지(施肇基)는 페스트 방역과 관련하여 회의에서 중점적으로 토론할 10여 개의 문제를 제시하였다. 폐페스트와 선페스트의 차이점, 방역 방법, 방역이 무역에 미치는 영향,
예방접종방법 등을 전문가들과 연구, 토론하여 해결책을 찾고자 한 것이었다. 회의 일정에는 하얼빈 방문과 방역의원, 실험실, 화장장 등 참관도 포함되었다.
회의의 연구 내용은 세 부분으로 나뉘었다. 1) 세균병리부는 일본인 기타자토 박사 주관 하에 주로 페스트 병균, 인체 병리 및 해부 등을 연구했다. 2) 방역의료부는 방역조치,
전염병 발생 상황, 전파, 격리 방법, 소독, 치료 등을 연구했다. 3) 역병역사연구부는 페스트 유행 역사와 사회에 끼치는 위해 영향을 탐구, 토론했다.
회의에는 미국, 프랑스, 독일 등에서 많은 의학전문가들이 참석했다. 이들 중 가장 인기 있었던 사람은 페스트 간균을 발견한 기타자토 시바사부로(北里柴三郞, 1853~1931)였다.
그는 페스트의 병원체인 페스트균을 알레상드르 예르생(Alexandre Yersin, 1863~1943)과 거의 동시에 발견한 인물이었다.
페스트 간균이 발견된 후, 의학계는 선페스트의 예방과 치료에 대해서는 비교적 많은 정보와 경험을 가지게 되었다. 그런데 1910~11년의 만주 페스트는 폐페스트로 판명되었다. 그럼에도
당시 페스트 방역에서는 선페스트의 대책인 쥐잡기가 여전히 강조되고 있었다. 따라서 본 회의에서는 폐페스트에 대한 정확한 인식과 그에 따른 대책의 강구가 중요한 과제였다.
이미 우롄더는 하얼빈으로 파견된 후 유행 페스트를 폐페스트로 확정하였고, 이후 방역의 중점을 쥐잡기가 아니라 사람과 사람 사이의 전염을 차단하는 데 두었다. 그러나 무명의 젊은
의학자의 주장은 러시아, 일본 등의 열강측에 좀처럼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는 일찍이 방역의 관건이 격리에 있다는 관점을 견지하다가 북양의학당 교수였던 프랑스 의사 제라드
메즈니(Gérald Mesney, 1869~1911)와 대립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마스크를 착용하지 않고 러시아 격리병원을 방문한 메즈니가 폐페스트에 감염되어 사망하는 일이 발생하면서
열강측도 우롄더의 주장을 수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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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3> 펑톈 국제 페스트회의장
회의에서 각국의 전문가들은 당시 의학계의 최신 연구성과를 공유하면서 폐페스트의 병리, 임상, 세균학적 특징에 대해 종합, 정리하였다. 그 결과 폐페스트는 사람에서 사람으로 전파되는
전염병으로 호흡 중에 배출되는 비말, 뱉은 침 등이 감염원이라는 결론을 도출했다. 방역에서는 환자의 신속 진단, 격리와 아울러 철도 방역의 중요성이 지적되고 마스크 착용의 중요성도
강조되었다. 아울러 청 정부에 중앙위생국 설치를 건의하기로 한 결의도 있었다. 그것은 전염병이 발생했을 때 전염병의 관리와 전염병 발생 정보를 제공하는 업무를 담당하도록 하기
위함이었다.
110년 전 페스트 방역에서 보인 중국의 대응과 또 세계 각국이 머리를 맞대고 앉아 대책 수립에 고심한 국제회의가 우리에게 주는 시사점은 무엇일까? 물론 회의 참가자들이 순수하게 방역
자체에 대한 열정과 관심만으로 참석했다고 할 수는 없을지라도.
현재 세계 각국의 코로나 19와의 사투는 여전히 끝이 보이지 않는다. 그럼에도 강대국 미국과 중국은 공동 대응을 논의하기보다는 바이러스의 기원을 비롯한 정치 공방을 이어갔다. 한쪽은
한 지역, 한 국가에 오명을 씌우려 했고 또 한쪽은 그 책임을 회피하려 했다. 전염병의 발생, 전파와 그에 대응한 통제는 이제 새로운 국면에 접어들었다는 위기감마저 느껴진다. 코로나
19의 통제와 종식을 위해 세계적 차원의 공동 대응이 그 어느 때보다 절실한 지금이다. 110년 전 국제공조의 역사를 되돌아봐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는 것이 아닐까.
신라대 역사교육과 전경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