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을 쳐서 보습을 창을 녹여 낫을’
평화의 섬, 진먼다오의 명소화 경험과 시사점
양안 접경인 진먼다오의 변화
지난 6월 중순 동아시아 접경지역 연구를 위해 중국·대만 접경인 진먼다오(金門島)를 찾았다. 진허리(金合利)대장간 문을 열고 들어서자 가마에서 막 꺼낸 시뻘건 쇳덩이를 연신 두들기는 경쾌한 망치 소리가 들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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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진허리대장간 내부 및 전시관
자료: 저자 현지촬영 (2020.6.15.)
중국과 대만이 첨예하게 대치하던 1950년대, 마을을 돌아다니며 못 쓰게 된 농기구 등을 고쳐 주며 살아가던 떠돌이 철제 수리공인 우중산(吳宗山). 중공이 진먼에 퍼부어댄 포탄의 잔해가 그의 눈에 들어왔다. 식칼 등 철제 일용품을 만드는데 있어 더할 나위 없이 훌륭한 재료가 될 수 있는 포탄의 파편이 섬 곳곳에 널려 있었다. 우중산이 포탄의 잔해를 재료로 삼아 담금질하여 만든 두꺼운 중식 식칼은 10만 명에 달했던 진먼도 주둔 군인이 제대할 때 반드시 사가는 귀향 필수품이 됐다.
우중산의 아들을 거쳐 이제는 3대 손자가 경영하는 진허리대장간은 ‘칼을 쳐서 보습(쟁기날)을, 창을 녹여 낫을 만드는’ 구약 성경의 구절을 자연스럽게 떠올리게 하는 진먼다오의 상징적인 명소로 자리잡았다.
탈냉전의 시기에 양안 간 군사대치가 완화되면서 동아시아의 열점(熱點)이었던 진먼다오에도 변화의 바람이 불었다. 개혁개방에 나선 중국은 1979년 미국과 수교 직후, 대만에 평화의 손짓을 했다. 1950년대 두 차례의 대규모 포격전 이후 하루걸러 홀숫날마다 빠짐없이 진먼다오로 쏘아대던 포탄이 드디어 멈췄다. 동시에 전국인민대표대회 상무위원회 명의의 ‘대만동포에서 보내는 서신(告臺灣同胞書)’을 통해 ▲양안 군사대결의 종식 논의 ▲양안삼통(三通: 통신·통항·통상) ▲양안교류 확대를 전격적으로 제안했다.
대만은 이 같은 중국의 대화 제의를 통일전선전술로 간주하고 중국과 타협·접촉·담판을 하지 않는 3불(三不)원칙을 고수하는 한편, 국시(國是)인 ‘삼민주의통일’을 제창하는 등 반공이념 강화로 이에 맞섰다. 그러나 변화의 바람을 거스를 수는 없었다. 3불 원칙에도 불구하고 대만 자본의 대중국 우회투자가 증가하는 등 양안 간 물밑 교류가 활발해졌다. 또한 정치민주화를 요구하는 대만 사회 내부의 목소리가 점차 커졌다. 이런 상황에서 국공내전 이후 줄곧 유지하던 대만 계엄령이 1987년 해제됐다.
접경인 탓에 비록 늦어지긴 했지만 진먼다오도 1992년 계엄이 해제됐다. 양안 간 대치가 완화되면서 진먼다오 군축이 빠르게 진행됐다. 10만 명에 달했던 주둔군이 3만 명 수준으로 급감하면서 군대 및 중앙정부의 재정 지원에 의존하던 진먼 지역경제의 근간이 흔들렸다. 이에 현(縣)정부는 접경으로서 진먼이 가지고 있는 고유의 지역자산(place asset)을 활용한 명소화(名所化)로 이 위기를 극복하고자 했다.
접경 지역자산을 활용한 진먼다오의 명소화(名所化)
진먼도 곳곳의 유명 전장, 철군으로 인한 유휴 군시설, 상륙을 저지하기 위해 해변 곳곳에 빼곡히 박아 놓은 날카로운 철근인 용치(龍齒), 참호 등이 전쟁관광지로 정비됐다. 젊은 시절 진먼에서 복무했던 퇴역군인, 민간의 접근이 금지됐던 접경에 대한 호기심을 품은 사람들이 진먼을 찾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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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전쟁관광 주요 시설- 해변 용치, 탱크, 참호
자료: 저자 현지촬영 (2020.6.19.)
주목할 점은 진먼의 변화는 전장관광지로 외지인의 호기심을 불러일으키는데만 머물지 않았다는 점이다. 지역명소화를 통해 진먼 당국은 양안 간 충돌과 갈등, 그리고 승전의 기억을 단순히 재현하는 것을 넘어서 반전과 평화의 미래 가치를 담아내고자 노력하고 있다.
예컨대 중국의 샤먼과 가장 가까웠던 탓에 지뢰 집중 매설지대였던 소진먼다오(小金門島) 해변가의 진지는 지뢰전시관으로 조성, 2001년 민간에 개방됐다. 한번 묻히면 군인과 민간인, 적과 아군을 구분하지 않는 가장 비인도적인 무기 가운데 하나인 지뢰. 지뢰전시관은 각종 전시물과 체험시설을 통해 방문객에게 지뢰의 폭력성과 반전·평화의 가치를 생생하게 전달하고 있다.
<그림> 소진먼다오 지뢰전시관 전시물
자료: 저자 현지촬영 (2020.6.19.)
중공의 폭격을 피해 물자와 인력을 안전하게 보급하기 위해 단단한 화강암을 뚫어 만든 해저터널 역시 지질교육관·소음악공연장 등 다목적 교육문화 공간으로 활용되고 있다. 또한 중공군의 상륙을 저지한 대표적인 승전지인 구링터우(九寧頭)에 2009년 평화기념광장이 건립됐다.
<그림> 해저터널의 소공연장·지질교육장 활용 사례
자료: 저자 현지촬영 (2020.6.19.)
민간인 통제 지역이었던 탓에 개발이 지체되고 사람의 손이 닿지 않아 원형이 보존된 푸젠(福建) 전통의 역사·문화 자산과 자연생태계 역시 평화 지향의 명소화에 활용되고 있다. 민간인 통제 해안가 절벽에 둥지를 튼 철새 군락지, 군시설 주변의 호수와 갯벌이 국가공원으로 지정됐다. 수달·철새·희귀어류 등이 천연기념물로 보호받고 있다. 진먼의 전통 역사문화는 분단된 양안 간의 동질성을 회복하는데 기여하고 있다. 보존된 자연생태는 적극적 평화(positive peace)의 장소성을 확산시키는 촉진제 역할을 하고 있다.
<그림> 진먼 전통 역사문화 유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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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사자상(風獅爺)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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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비꼬리 처마의 전통주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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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교유산 득월루(得月樓).
자료: 저자 현지촬영 (2020.6.19.)
진먼의 상향식(bottom-up) 평화지대 조성의 경험과 시사점
대만의 최전방이자 냉전의 첨병이었던 진먼다오가 평화의 섬으로 변모했다.
이 같은 진먼의 변모의 원인을 탈냉전과 같은 국제정세 등 외부 환경에서만 찾을 수는 없다. 접경으로서 갖는 지리와 경관 등 장소의 물리적 특징, 역사·문화, 생태 등 고유의 장소자산을 활용한 지역 차원의 노력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진먼을 평화의 섬으로 일구고자 한 지역 차원의 선도적 역할은 양안 교류에서도 발휘됐다. 2001년 1월2일 진먼의 초대 민선 현장(縣長)인 천쉬자이(陳水在)를 단장으로 한 180명의 대륙 방문단이 바다 건너 중국 샤먼(夏門)으로 가는 배에 올랐다. 오랜 진통 끝에 합의된 양안 소삼통(小三通)의 첫걸음이 이렇게 내딛어졌다.
대만 정부는 전면적인 양안교류가 가져올 부작용을 우려, 접경에 한정하여 교류를 허가하는 소삼통 방안을 전향적으로 수용했다. 하지만 양안 교류에 있어 대만 중앙정부는 줄곧 조심스럽고 소극적인 태도를 취했다. 오히려 진먼 지방정부가 나서 양안 접경 협력을 선도하고 그 기틀을 마련했다.
2001년 소삼통 이후 코로나19로 외국인 입국이 전면 제한된 2020년 2월까지 진먼을 통해 중국을 오간 누적 인원은 2,100만 명을 넘는다. 진먼·샤먼이 양안교류의 선행시범지로 지정되면서 진먼은 중국의 인접 지역과 사회·문화적 생활권을 회복했다. 독립지향의 민진당 집권 때 마다 양안의 정치적 갈등이 고조되는 상황이 반복되고 있지만, 진먼이 중국과 구축한 다층적 관계망은 악화된 상황을 완화하고 관계를 보다 빨리 복원하는데 기여하고 있다.
접경 고유의 지역자산을 활용한 내생적(內生的)이며 상향식의 평화지대 조성과정. 이를 통해 냉전의 최전방에서 평화의 섬으로 탈바꿈한 진먼의 경험과 성취가 여전히 군사안보 충돌과 정치적 갈등으로부터 좀처럼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우리에게 주는 시사점은 매우 크다.
진먼다오와 마찬가지로 남북 접경은 고유의 지리·경관, 군사유적, 접해 있는 북측과 공유하는 역사·문화 그리고 사람의 손이 닿지 않은 생태환경 등의 풍부한 장소 자산을 갖고 있다. 2018년 4·27 판문점회담 및 9·19 평양회담을 통해 남북 정상은 DMZ 긴장완화를 위한 군사조치와 서해경제특구 등 일련의 접경협력 구상에 합의했다. 남북 접경협력이 단순한 경협 및 관련 인프라 조성 차원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인문·생태·경제 이슈를 포괄하고 보다 적극적인 평화 가치를 실현할 수 있도록 지혜를 모을 필요가 있다.
인천연구원 김수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