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이 살아가기 위해서 필요한 것을 흔히 ‘의식주(衣食住)’로 칭한다. 그중에서 옷은 날씨 혹은 기타 사물로부터 우리의 신체를 보호하는 생활적인 기능을 가지는 동시에 착용한 사람의 신분이나 속한 문화권을 나타내는 등의 사회적 기능을 가지기도 한다.
그러면 아래의 ‘사진11)
’을 보자. 여러분은 어떤 생각이 드는가? 이는 중국에서 2010년에 방영된 드라마 <新三國>의 한 장면으로, 사진 속의 인물은 천하오(陳好)가 연기한 초선(貂蟬)이다. <新三國>은 원말-명초(元末-明初)시대 인물인 나관중(羅貫中)의 소설 <三國演義>를 바탕으로 제작되었으며, 주지하다시피 <三國演義>는 동한 말기에서 서진 초기까지의 중국을 배경으로 하고 있는데, 드라마 속의 의상 역시 상의하상(上衣下裳: 웃옷과 치마)으로 요대가 저고리를 덮고 있으면서 치맛단이 허리선을 기점으로 거의 일직선으로 떨어지는 전형적인 ‘漢服’의 형태에 속한다.
-
사진1 (貂蟬, <新三國>)
-
사진2 (譚允賢, <女醫明妃傳>)
그런데 사진2를 보자. 의복이 이상하게도 익숙하지 않는가? 이는 중국에서 2016년에 방영된 드라마 <女醫明妃傳>으로, 사진 속의 인물은 류스스(劉詩詩)가 연기한 담윤현(譚允賢)이다. <女醫明妃傳>은 명(明) 정통제/천순제(正統帝, 재위: 1435년~1449년/天順帝, 재위: 1457년~1464년)2) 및 경태제(景泰帝, 재위: 1449년~1457년) 시기배경으로 하고 있는데, 드라마 속의 의상은 저고리가 치마 위쪽을 덮으며 치맛단이 아래로 내려갈수록 펼쳐지는 형태이고, 이는 마치 우리의 한복과 유사한 형태를 하고 있다.
그리하여 <女醫明妃傳>이 방영된 후에 중국 네티즌들 사이에서 “도대체 의상 고증을 어떻게 한 것이냐?”, “설마 한국드라마 <대장금>을 베낀 것은 아니냐?” 등의 격한 반응이 나오기도 했는데, 이에 <女醫明妃傳>의 제작진은 “명의 복식이 조선에 영향을 끼쳤다”는 식의 해명3)을 한 바가 있다.
그러나, 명 초기의 한복과 유사한 이러한 의상은 중국 대륙[원(元) 및 명(明)]과 한반도[고려(高麗) 및 조선(朝鮮)] 사이의 문화 교류가 낳은 ‘고려양(高麗樣)’ 혹은 ‘고려풍(高麗風)’이 반영된 것이며, <女醫明妃傳> 제작진이 의상 고증 자체는 비교적 충실히 하였다 말할 수 있다.
‘고려양(高麗樣)’ – ‘한류(韓流)’의 원조?
그렇다면 이러한 복식을 탄생시킨 ‘고려양’은 무엇인가?
1231년에 몽골이 고려를 침공한 이후, 39년간의 대몽항쟁 끝에 1270년에 고려의 원종이 카라코룸에서 쿠빌라이 칸에게 항복을 하면서 고려는 몽골에 복속되게 된다. 이후에 원(元)4)
조정은 고려로부터 많은 물자를 수탈하였을 뿐만 아니라, 고려 조정으로 하여금 공녀(貢女)를 진상하도록 강요하였는데, 기록에 따르면 원 간섭기 동안 2,000명 이상의 공녀들이 원나라로 건너간 것으로 추정된다.5)
이에 많은 수의 고려 여인들이 원 조정 혹은 대관들의 저택으로 들어가게 되면서 자연스레 고려의 풍습이 원에 전해지고 유행을 하게 되었는데, 특히 복식이나 아청(鴉靑) 등이 원에서 큰 인기를 끌게 된다. 이와 관련된 다음과 같은 기록들이 존재한다.
“궁중의 의상은 고려의 양식을 새로이 숭상하니, 방령이 허리 아래까지 덮지만 반팔을 드러내네. 밤마다 궁중에서 앞을 다투어 바라보는 것은 (고려의 여인들이) 일찍이 입고서 어전(御前)에 왔기 때문이라네. (장욱, <궁중사> 제21수)6)
”
“지정(自至: 원 혜종(惠宗)의 연호) 이래, 궁중의 급사와 사령 가운데 태반이 고려의 여인이었다. 이로 인해 사방의 의복과 신발, 모자, 기물이 모두 고려의 모습을 좇아 일시에 유행을 하니, 어찌 우연하다 할 수 있는가? (권형, <경신외사> 하권)71))
”
“후에도 고려의 미인을 많이 들였으며, 대신들과 같이 권력을 가진 자들이 이를 귀하게 여기게 되었으니, 수도의 고관대작들은 반드시 고려 여자를 얻은 후에야 명가가 될 수 있었다. 궁중의 급사와 사령 중 태반이 고려 여자이기에, 사방의 의복, 신발과 모자, 기물을 모두 고려의 것을 모방하니, 온 세상이 미친 것 같다. (필원, <속자치통감 214권, 元紀32>)8)
”
“모두 고려의 것을 모방하니, 온 세상이 미친 것 같다(皆仿高麗, 擧世若狂.)”라는 표현이 등장할 정도면, 원에서 고려의 풍습이 얼마나 인기를 끌었는지 짐작을 할 수 있다.
이러한 고려양은 명(明) 성화제(成化帝, 재위: 1465년~1487년) 시기까지 이어지다 홍치제(弘治帝, 재위: 1488년-1505년) 초기에 ‘고려 혹은 조선에서 들어온 요사스럽고 부화(浮華: 겉만 화려하고 실속이 없음)한 시정잡배들이나 하는 풍습’이라는 이유로 금지가 되는데, 다음의 기록에서 확인할 수 있다.
“마미군(馬尾裙)은 조선국에서 비롯되어 수도에 유입되었는데, 수도 사람들이 이를 구입하여 입고 다녔으나 능히 이를 짤 수 있는 직공이 없었다. 처음에는 부유한 상인, 귀족, 기생들만 입을 뿐이었으나, 이후에 무신들의 대다수도 이를 입게 되니 비로소 수도에서 만들어 파는 자가 생겼다. 이에 귀천을 떠나 입는 자가 날로 늘어났다. 성화(成化, 1465년~1487년) 말년에 이르러서는 조정의 대신들 대부분이 이를 입었다. 대체로 옷은 하체가 비어있고 펴져있으니, 눈과 귀가 즐겁기는 하다. (중략) 이 옷은 요사스럽기 짝이 없었기에, 홍치(弘治, 1488년-1505년) 초기에 비로소 이를 금지하는 법례가 생겨났다. (육용, <숙원잡기 10권>)9)
”
“홍치 원년 정월 갑인일(148 8년 1월 19일, 음력) 전 좌시랑 장열이 예전에 첨도어사를 맡고서는 온몸에 마미군을 걸쳤는데, 이는 조정의 녹을 먹는 관리가 시정의 부화(浮華: 겉만 화려하고 실속이 없음)한 차림새를 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중략) 이에 상께서는, 옛 법전의 명령에서 지키고 행해야 할 바를 널리 밝혀, 이후로는 금위군으로 하여금 마미군을 입은 자들을 체포하고 이에 대해 가벼이 말하는 것을 금한다고 하셨다. (<효종경황제실록 9권>)”10)
-
사진3 (명조 초기 복식)
-
사진4 (명조 후기 복식)
위에서는 주로 고려가 대륙에 영향을 끼친 ‘고려양’에 대하여 다루었으나, 원(元)이나 명(明)의 복식 역시 한반도에 영향을 끼쳤음도 부인할 수는 없다. 즉, 의복을 비롯한 문화의 전파는 강자의 일방적 시혜가 아니라 쌍방향 교류였으며, 그 가운데서 ‘한민족(韓民族)’과 ‘한족(漢族)’의 문화가 각각의 고유성을 가지고 발전해 온 것임을 기억해야 한다.
중국인들이여, 저우언라이(周恩來) 및 덩샤오핑(鄧小平)의 말을 시금석으로 삼자.
2010년 중국의 GDP는 일본을 추월하여 세계 2위가 되었으며, 이에 따라 중국인들의 자국 및 자국 문화에 대한 자부심도 더욱 상승하였다. 의복에 있어서도 ‘한푸(漢服)’라는 용어까지 생겨나며 민족의식을 고취시키려 하고 있다.
물론 어느 나라가 되었건, 자국의 문화에 대하여 자부심을 가지는 것 자체를 아무도 탓할 수 없다. 더군다나, 일개 소국(小國)도 아닌 오랜 기간 동아시아 문명을 이끌었던 ‘중화문명(中華文明)의 대국(大國)’ 중국이 아닌가?
그렇지만 자부심을 넘어서 ‘패권주의’ 혹은 ‘국수주의’로 읽힐 수 있는 움직임이 일부 존재하는 까닭에, 우리나라를 비롯한 이웃 국가들이 때때로 우려의 눈길을 보내는 것도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무릇 대국(大國)일수록 주변의 국가들을 존중하고 포용하되 ‘대국주의(大國主義)’ 및 ‘패권주의(覇權主義)’를 경계해야 할 것이니, 이와 관련하여 저우언라이(周恩來) 전 총리와 덩샤오핑(鄧小平) 전 중앙군사위원회 주석이 남긴 말을 살펴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이러한 역사 연대에 대한 두 나라 역사학자의 일부 기록은 진실에 그다지 부합하지 않는다. 여기에는 중국의 역사학자들을 비롯한 많은 이들이 대국주의나 광신적 애국주의의 관점에서 역사를 써내려간 것에 주요한 원인이 있다. 그리하여 많은 문제들이 공정하지 못하게 기술된 것이다. (저우언라이, <저우언라이 총리가 조중관계에 대하여 논하다>(1963년) 중 일부)”11)
“만일 어느 날 중국이 노선을 바꾼다면, 즉 초강대국이 되어 패권을 주장하고, 도처에서 남을 괴롭히며 침략하고 착취한다면, 세계의 모든 인민들이 응당 들고일어나 중국을 ‘사회제국주의’로 규정한 후에, 이를 폭로하고 반대하며, 또한 중국 인민들과 함께 무너뜨려야 할 것이다. (덩샤오핑, 1974년 UN연설 중 일부)”12)
저우언라이(周恩來) 전 총리와 덩샤오핑(鄧小平) 전 중앙군사위원회 주석은 모두 중국의 최고위급 지도자로서 자국이 부강한 국가가 되기를 원하였으나 ‘대국주의’ 혹은 ‘패권주의’의 함정에 빠질 것도 심히 우려하고 있었는데, 필자도 이에 동의하는 바이다.
다시 말하면, 필자는 중국인들이 G2로 올라선 중국의 위상에 걸맞은 자부심을 가지고 행동할 수 있으며 이를 타국에서 책망할 수는 없다고 생각한다. 그렇지만, 그 자부심이 모든 것을 중국으로 흡수하고 발밑에 두려는 ‘대국주의’나 ‘패권주의’가 아닌 동아시아 및 세계를 선도(先導)하면서도 주변국을 존중하고 포용하는 진정한 의미의 ‘중화주의’로 발전하고, 이를 통하여 한중 양국이 선린 관계를 더욱 돈독히 해 나갈 수 있기를 바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