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학계에서 ‘동아시아 담론’이 태동한 지도 상당한 시간이 흘렀다. 안으로는 6월 항쟁에 따른 ‘87체제’의 수립, 밖으로는 ‘탈냉전 시대’를 연 베를린 장벽의 붕괴와 구소련 해체 등의 역사적 배경 속에서, 동아시아 담론은 1990년대 한국 지성계를 수놓은 여러 주요한 담론들 중 하나로 급부상했다. 주지하다시피, 동아시아 담론은 우리나라의 문제와 한반도의 문제가, 한반도의 문제와 동아시아 각국의 문제가, 그리고 동아시아의 문제와 세계의 문제가 긴밀하게 착종되어 있다는 인식에서 출발했다. 그리고 동아시아의 연대는 1997년 아시아 금융위기를 거치면서 보다 실질적이고 긴급한 아젠다로 부상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후 ‘동아시아 담론’은 한중일 삼국을 중심으로, 비판적 지성들의 사상 교류와 문제 공유의 장이 되었고 동아시아 각국이 서 있는 서로 다른 문제 지평을 이해하고 조정하는 과정 속에서 심화되어 갔다. 아울러 동아시아 각국의 사상 자원을 통해 서구 중심적 근대성에 대항하는 새로운 시대정신을 구축하는 문제 또한 동아시아 담론에서 빠뜨릴 수 없는 중요한 의제였다.
동아시아 담론이 드러낸 여러 가지 한계와 문제점들은 여전히 동아시아 각국 지식인들의 분발을 촉구하고 있다. 각국이 보유하고 있는 유사하면서도 상이한 문화전통, 그리고 근대 역사 속에서 각국이 처했던 식민-피식민, 침략-저항의 이질적인 경험들은 동아시아를 바라보는 내부의 시선과 태도에 상당히 깊은 균열을 형성했다. 아울러 ‘동아시아’를 서구 패권에 대한 하나의 대항적 주체로 상정하는 일이 되레 제3세계로 불려온 비서구 국가들 속에서 ‘동아시아’를 또 하나의 특권적 주체로 삼는 것은 아닌가 하는 물음도 던져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보다 근본적인 층위에서 보자면, ‘동아시아’에 대한 상상은 근대 동아시아에 성립된 국민국가(nation state)를 비판적으로 초월하는 전제에서 출발할 필요가 있으며, 이는 다시 동아시아에 거주하고 있는 ‘근대적 국민국가의 주체들’을 어떻게 ‘반(反)근대적 동아시아적 주체들’로 탈바꿈시킬 것인가 하는 물음을 가능케 한다. 즉 동아시아 각국의 민중들이 스스로를 국민국가의 일원이 아니라 동아시아의 일원으로 상상할 수 있도록 하는 사상적·문화적 기제를 어떻게 발굴하고 확장시킬 것인가 하는 문제가 동아시아 담론의 심층 의제로 자리하고 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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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물음과 관련하여 최근에 출간된 서광덕 선생의 『루쉰과 동아시아 근대』는 지난 20여 년 간의 ‘동아시아 담론’을 개괄하고 평가하면서, ‘동아시아적 주체’의 구성을 위한 소중한 사상 자원으로 ‘루쉰(鲁迅)’을 소환한다. 사실 ‘루쉰’이라는 이름은 아주 오래전부터 한·중·일 지식인들 사이에서 유통되었고, 각국이 처한 시대적 상황에 따라 상이한 방식과 태도로 수용되었다. 다케우치 요시미(竹內好)와 리영희는 동아시아 사상계에서 루쉰이 퍼뜨린 비판과 저항의 씨앗을 각국의 토양 위에 옮겨 심어 풍성한 과실수로 길러낸 사상가들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더욱이 다케우치 요시미는 개혁개방 이후 중국 문학계에 떠오른 새로운 루쉰 연구 경향에 크나큰 영감과 문제의식을 던져주었던 인물이었다. 태평양 전쟁기 일본에서 독특하고도 심오한 방식으로 해석된 루쉰은 1980년대 중국으로 역류하여 첸리췬(钱理群), 왕후이(汪晖), 쑨거(孙歌) 등 비판적 지식인들을 배태해냈던 것이다. 그러나 앞서 언급한 ‘동아시아적 주체’의 확립에 있어 루쉰이라는 이름이 어떠한 의미를 지닐 수 있을지 하는 물음은 보다 근원적인 층위에서 동아시아 담론이 맞닥뜨린 문제를 돌파하는 데 있어 또 다른 사유를 견인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이 점에서 서광덕 선생의 책은 숙독할 만한 가치를 지닌다.
『루쉰과 동아시아 근대』는 크게 두 부분으로 구성된다. 첫 번째 부분에서는 동아시아에서 루쉰이 그간 어떻게 읽혀왔나 하는 점을 다룬다. 이를 위해 저자는 주로 다케우치 요시미, 마오쩌둥의 루쉰 수용 문제를 서술했으며, 소략하게나마 리영희의 루쉰 수용에 관해서도 언급한다. 그리고 두 번째 부분에서는 루쉰 사상의 구체적인 내용을 ‘근대성 비판’, ‘악성(惡聲) 타파’, ‘번역’, ‘문학론’ 등 네 가지 차원에서 다룬다. 동아시아 담론에 대한 개괄과 진단, 그리고 루쉰 문학과 사상이 동아시아에서 갖는 의미에 관하여는 ‘여는 글’과 ‘맺는 글’에 서술되어 있다.
개인적으로 이 책에서 가장 흥미로웠던 부분은 제5장에서 다룬 루쉰의 ‘근대성 비판’과 관련된 내용이었다. 루쉰의 초기 글인 「과학사교편(科學史敎扁)」, 「문화편향론(文化偏至論)」, 「마라시력설(摩羅詩力說)」, 「파악성론(破惡聲論)」 등에서 엿볼 수 있는 서구 근대성에 대한 비판적 사유와 청말 양무파, 유신파, 혁명파 등 새로운 지식인 집단에 대한 문제제기가 위의 장에서 다루어진다. 1900년대 초 일본에서 유학중이던 루쉰은 서구식 문물과 제도를 수용하여 당면한 문제를 해결하려 했던 개혁적 지식인들이 하나같이 서구적 근대성이 노정하는 심각한 폐단을 인식하지 못했음을 지적한다. 루쉰에 따르면, 서구의 자본주의와 민주주의, 그리고 이를 기반으로 성립된 국민국가는 인간 개인의 사상과 의지를 고취시키기보다는 오히려 인간 개인을 국가라는 공동체의 가장 작은 단위로 전락시키고 개인의 능력을 평준화시켰다는 점에서 한계를 드러냈다. 따라서 서구 제국주의 열강의 침략에 고통 받던 당시 중국에서 진정 필요한 것은 서구의 과학기술이나 정치제도와 같은 피상적인 문물이 아니라, 중국인 개개인을 세태에 맞서 강렬하게 저항하는 ‘무사(武士)’로 만들어 줄 심오한 사상과 영감이다. 루쉰을 동시대 다른 지식인들과 다른 이와 같은 사유로 안내해 준 이는 ‘니체(F. Nietzsche)’와 바이런(G. G. Byron)으로 대표되는 19세기 유럽의 철학자, 시인이었다. 특히 니체는 서구의 이성주의적 사고방식과 기독교가 유럽인들의 뇌리에 심어둔 ‘선악’ 관념에 큰 반감을 지니고 있었고, 아울러 근대 민주주의가 주창한 시민주권, 자유의지, 평등과 박애 등 가치를 부정했다. 니체가 보기에 근대 서구사회는 허무주의적이고 무기력하기 짝이 없는 약자들의 사회였다. 니체가 제시하는 바람직한 인간상은 기독교와 민주주의의 부정적 이념을 넘어 자기입법적이고 오로지 ‘힘/권력’을 의지하는 ‘위버멘쉬(Übermensch)’, 즉 초인이었다. 그러한 인간은 일체의 이념적, 윤리적 구속으로부터 초월하여 오직 자신의 힘을 관철시키려는 긍정적 의지로 충만한 존재라 할 수 있다. 루쉰은 바로 니체의 ‘초인사상’을 수용하여, 봉건주의와 서구 민주주의 제도의 굴레로부터 벗어나 자기 내면의 진정한 목소리(心聲)를 발설하고 스스로의 힘을 억압적 세계 속에서 관철시키기 위해 투쟁하는 영웅만이 중국 민족을 곤경으로부터 끄집어낼 수 있다고 믿었던 것이다. ‘용서’나 ‘관용’보다는 ‘복수’, ‘응징’을 고무하는 루쉰의 비타협 정신이 여기서 비롯되었다. 따라서 루쉰의 미완성 수고인 「파악성론 」에서 말하는 '악성'은 새로운 자기입법적 주체의 탄생(立人)을 위한 투쟁의 대상이라 할 수 있다.
이와 같은 루쉰의 인간관이 어떻게 ‘동아시아적 주체’의 확립을 위한 사상적 자원으로 활용될 수 있을지를 고민하는 것은, 오늘날 서구식 민주주의와 국민국가 체제가 봉착한 문제를 타개하기 위한 방편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위 책의 저자 역시 ‘맺는 글’에서 바로 그러한 이유로 루쉰 사상의 의미를 되새김한다. 그는 “우리의 경험 곧 촛불로 대변되는 시민(의식)을 동아시아에서 길러내는 일을 루쉰의 글과 사상을 통해서 실현하는 일이 소중하다”(335쪽)고 말하면서, 루쉰 사상이 오늘날 동아시아적 맥락에서 가질 수 있는 의미를 탐색한다. 그리고 “한국을 비롯한 동아시아의 시민운동은 서구와는 달리 ‘주체적 개인’의 탄생과 같은 인간학 즉 인문학적 바탕에서 다시 재구성해 들어가야 한다.”(336쪽)고 주장한다. 이러한 생각에는 서구의 시민운동이 ‘인문학적 바탕’이 아니라 ‘법학’, ‘정치학’ 등 ‘사회과학적 바탕’에 기초한다는 전제가 깔려 있다. 이와 같은 저자의 문제제기는 대체로 공감을 표시할 수 있겠으나, ‘시민’이라는 개념이 갖고 있는 근대 서구 정치적 내함, 그리고 서구의 시민운동이 지녔던 인문전통의 깊이를 생각해본다면, 위와 같은 주장은 다분히 도식적이고 편파적인 것으로 생각될 수 있다.
아울러 이어지는 저자의 논술은 무척 소박하고, 더러는 니체-루쉰이 제시한 반(反)근대적 주체의 성격과도 모순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저자는 위에서 언급한 ‘인문학적 바탕’의 한 축으로 서구의 ‘자유’와 ‘평등’의 가치를 제시하는데, 이것들을 니체와 루쉰이 말한 자기입법적이고 독립적인 주체를 통해 구현할 수 있는가 하는 점은 좀 더 고민이 필요할 듯하다. 주지하듯, 근대 서구 민주주의가 발 딛고 있는 ‘자유’, ‘평등’의 가치는 시민주권, 천부인권 사상, 그리고 이를 현실화하는 정치제도, 국민국가적 상상 등과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를 형성한다. 또한 그것은 한 편으로는 중세 봉건적 질곡으로부터 개인을 해방했지만, 다른 한 편으로는 (미셸 푸코식으로 말하자면) 미시 권력에 의한 근대적 주체의 탄생이라는 새로운 형식의 통치술의 이념적 기반이 되었다. 따라서 서구식 근대에 저항하는 ‘동아시아적 주체’를 새로이 상상하는 작업은 위에서 서술한 근대적 개념, 제도, 가치의 고리들이 더 이상 인간의 다양한 생각과 의지를 속박할 수 없도록 하는 데서 출발해야 할 것이다.
물론 루쉰의 사상은 아마도 ‘동아시아적 주체’의 상상을 위한 ‘출발점’으로서만 의미가 있을 것이다. 단순히 니체와 루쉰이 말한 개인의 자율적 의지와 독립적인 행위 규준만으로는 동아시아적 주체를 온전히 창출할 수 없을 것이다. 특수한 역사적 조건이 무르익은 연후에야 비로소 그와 같은 주체적 상상이 실현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루쉰의 말처럼 문학은 (그리고 어쩌면 사상조차도) 확실히 ‘무용지용(無用之用)’이다. 루쉰의 문학과 사상은 동아시아적 주체를 창출하는 충분조건이 될 수는 없으며, 그것은 특정한 물적 토대 위에서만 비로소 일정한 역량을 발휘할 수 있다는 말이다. 다만 그와 같은 객관적 조건이 무르익을 때를 대비해서, 사상적으로 잘 무장된 지식인 집단이 필요할 것이다. 동아시아에서 루쉰이라는 이름이 지식인들의 사상적 무장을 독려하고 촉구하는 하나의 ‘외침(呐喊)’으로 여전히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앞으로도 그러하리라는 점은 재차 언급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