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민 결사체, 매개구조, 그리고 시민사회

들어가며
13세기 중국에 체류하던 마르코 폴로는 항저우를 방문하고는 놀라움과 감탄을 금치 못했다 전해진다. 토크빌이 미국에서 목격했던 것처럼, 항저우 곳곳에서 발견되는 다양하고 역동적인 공공 및 민간 결사체(association)들 때문이었다. 마르코 폴로가 본 당시의 항저우는 무수히 많은 공공병원, 무료 공동묘지, 노인 보호시설, 상인조합, 문인집단과 문화단체들로 가득한 활기 넘치는 곳이었다.
개인 혹은 주민들이 모여 조직한 크고 작은 다양한 결사체와 조직들은 오랜 동안 세계 각지에 존재하며 중요한 역할을 수행해왔다. 인간은 사회적 존재이기에 함께 모여 집단을 만들고 그 집단 속에서 상호 연결되어 교류하는 가운데 생활하는 것은 매우 정상적이고 자연스러운 일이다. 이것은 인간 본연의 본성이자 과거 전통사회로부터 현재까지 이어져 온 인류의 보편적 경험이다. 인간은 집단 속에서 서로 어우러져 마을과 지역의 문제를 함께 해결하기도 하고, 자신들의 권리와 이익을 지키고 증진하기 위해 행동하기도 하며, 자신들이 추구하는 모종의 가치와 신념을 실현하기 위해 노력하기도 한다. 또한 –그리 거창한 것이 아니더라도- 아주 단순하게, 단지 서로 모여 노래 부르고 먹고 마시는 가운데 춤을 추며, 마을잔치를 열고 지역축제를 벌이며 즐거워하면서 삶의 의미를 느끼기도 한다. 현대로 오면 어떨까. 자신이 살고 있는 지역에서 모임과 조직을 만들어 한부모 가정 혹은 조손가정의 아동 케어, 독거노인과 장애인 돌봄, 청소년 미혼모 발견과 보호, 환경정화, 지역사회 활성화 등 국가와 관료집단이 잘 하지 못하거나 혹은 –여러 가지 이유로- 하려고 하지 않는 다양한 사회적 서비스 활동을 수행하기도 한다. 오래 전부터 인간사회에 존재해 온 이와 같은 조직/집단/결사체/공동체에 대한 평가는 좌우를 무론하고 대개 긍정적이다. 보수주의자들은 이를 두고 전통적 윤리와 도덕가치를 전승하고 재건하는 수단으로 인식하고 있고, 진보주의자들은 사회 전체 나아가 세계 전체의 진보를 위한 풀뿌리적 도구로 이해하곤 한다.
세계 각지의 전통사회마다 무수히 많이 존재하던 이런 결사체들은 –대략적으로 말하자면- 근대국가의 등장 이후 급속도로 약화되거나 사라졌다가 –역시 대략적으로 말하자면- 비교적 최근에 이르러 빠른 속도로 다시금 등장하게 된다. 특별히 1990년대 들어 지구적 차원에서 –NGO/NPO로 대표되는- 민간사회조직이 폭발적으로 증가하게 되는데, 일군의 학자들은 이를 일컬어 전지구적 ‘결사 혁명(associational revolution)’이라 명명한 바 있다.
이와 같은 현상과 대상을 분석하고 설명하기 위한 사회과학 분야의 여러 이론과 접근법이 존재한다. 그 가운데, 인류 역사와 사회 속에 존재하는 다종다양한 시민 결사체들을 ‘매개구조’라는 개념으로 접근하는 이론이 있다. 결사체들의 역할 중요성과 그것이 개인-사회-국가에 미치는 영향과 의의 등에 대해 탐구하는 이론적 입장인데 본 글에서는 매개구조의 개념과 매개구조론의 등장배경에 대해 간략하게 고찰해보고자 한다.
매개구조의 개념정의
매개구조(mediating structure) 개념을 체계적으로 정립한 피터 버거에 따르면, 매개구조란 결론적으로 ‘사적 생활을 영위하는 개인과 그 개인들의 공적 생활의 중심이 되는 거대구조(mega structure) 사이에 위치하는 다종다양한 중간적 조직체들’이다.
서구의 역사적 경험을 보면, 근대화 및 산업화된 현대사회는 개인(혹은 시민) 그리고 –국가와 정부로 대표되는- 거대구조로 특징지을 수 있는데, 매개구조는 쉽게 말해, 현대 사회구조의 양대 특징인 개인과 거대구조, 또는 시민과 국가를 매개(mediating)하고 연결(lingking)하는 교량적 기능을 지닌 통로로서의 중간구조를 의미한다.
사회 내 존재하는 매개구조의 대표적 예로는 가족/가정, 이웃, 주민위원회, 동호회, 종교집단, 협회, 자조집단, 조합, 이익단체, 자발적 조직(voluntary association), 시민단체, 자선단체, 사회복지기관, NPO/NGO, 각종 결사체 및 사회집단 등이 있다. 이렇듯 매개구조의 범위와 종류는 매우 광범하고 다양하기에 각 시대와 각 사회마다 대표적 매개구조는 모두 상이하다. 예컨대, 중국으로 대표되는 동아시아의 전통 유교적 사회에서는 가족과 가문/친족집단이, 중세 유럽에서는 종교집단(즉 기독교)과 길드가 매개구조의 대표적 사례였다고 말할 수 있다. 그리고 매개구조가 개인/시민과 거대구조/국가 사이의 어느 지점에서, 어떤 정도와 어떤 모습으로 양자를 매개 및 연결하느냐의 문제 역시 주어진 정답은 없고, 각국 각 지역과 사회마다 그 양태가 서로 다를 수 밖에 없다.
매개구조론의 등장 배경
피터 버거가 본격적으로 매개구조 개념과 역할 중요성을 주창하기 이전에도 서구 사회학의 전통과 흐름 속에는 그와 유사한 논의가 존재해왔다. 대표적으로 뒤르켐을 꼽을 수 있는데, 뒤르켐은 서구 전통 사회의 단절과 근대화가 초래한 후유증 및 폐해를 언급하면서, 현대사회는 거대구조인 국가와 미시구조인 개인만을 남겨 놓은 채, 기존 전통사회에 존재했던 ‘작은 집단들(little aggregations)’을 소멸시키게 되었다고 결론 내린다.
즉, 근대화 이후의 사회변동과 구조변화의 부정적 측면들은 기존의 인간사회에 전통적으로 존재해왔던 조직/집단/공동체들이 파괴됨으로써 초래되었다는 것이 뒤르켐의 관점인데, 그 외 게오르그 짐멜, 페르디난드 퇴니스, 탈코트 파슨스 등 유럽대륙과 미국의 사회학자들 역시 서구 현대사회에 대해 뒤르켐과 비슷한 분석을 내놓은 바 있다.
예컨대, 파슨스는 매개구조 대신 ‘경계구조(boundary structure)’라는 개념을 사용하는데, 가족과 교회 등 개인과 사회의 경계에 위치하며 양자를 연결해주는 조직/집단의 역할이 현대사회에서 점차 축소되고 약화되는 현상을 지적하면서, 현대사회의 여러 문제적 현상과 병리적 현상들을 완화하고 해소하려면 경계구조들이 다시금 ‘사회의 중심’으로 복원될 필요가 있음을 역설하고 있다. 한나 아렌트 역시 현대사회 등장 이후 발생한 공적영역과 사적영역의 구조변화 및 양자 간의 관계성 상실에 주목하면서, 공공영역은 개인과 시민의 삶에서 이제 거의 다 사라지게 되었다고 탄식한 바 있다.
서구 근대화를 추동하고 이끌었던 산업화, 특히 분업의 확대는 기존의 사회제도와 구조에 대한 공전의 변화를 가져왔다. 분업으로 인한 분화 현상은 사회제도의 파편화를 초래하게 되었고, 사회의 파편화는 최종적으로 각 사회요소들 간의 단절과 폐쇄로 귀결되었다. 그로 인해, 사회구성원들의 사적생활과 공적생활을 연결하고 결합시켜주는 여러 매개구조/중간구조들에 뿌리를 박고 소속된 채 –양자 간의- 통합적 삶을 영위하던 개인들의 삶에 변화가 발생하게 되었다. 사회를 구성하는 개개인의 사적생활/사적영역과 공적생활/공적영역 간의 철저히 단절과 분리가 이루어진 것이다. 이러한 부정적 변화는 개인들의 유기적/화학적 집합체인 사회에도, 그리고 최종적 거대구조인 국가에도 심대하고 심원한 악영향을 초래하게 되었다.
사회를 구성하는 개인들의 사적영역(private sector)과 공적영역(public sector)의 단절과 분리에 대해 좀 더 설명해보자면 다음과 같다. 고도로 분업화, 기계화/기술화, 합리화, 전문화된 사회에서 개인은 철저히 구조화된 기능과 부여된 역할만을 기계적으로 수행하며 살아가게 되었다. 존재의 의미와 가치, 정체성, 개성, 인격성, 성취감, 삶의 보람 등은 사라지고 과거의 인격적이었던 인간관계마저 –판매자와 구매자 등의- 기능적 관계로 대치되었다. 마치 인체 내 신경조직과 혈관처럼, 각각 촘촘하게 연결되어 사회를 이루는 무수히 많은 매개구조에 속해 상호 연결되어 있던 개개인들은 이제 그것에서 뿌리 뽑힌 상태로, 거대한 메커니즘 속에서 파편화된 채로 기계적으로 부여받은 기능만을 수행하는 부속품으로 살게 되었다.
이러한 공적생활에서의 비인간화는 존재의 상실감, 공적영역에 대한 좌절감, 거대구조에 대한 무력감과 실망감 등으로 이어지고 이는 다시 사생활로의 도피 현상을 가져오게 되었다. 공적생활에서 강제로 뿌리 뽑힘으로써 발생한 자아 정체성 등의 상실을 사적생활에 몰두함으로써 보상받으려 하게 되었다는 뜻이다.
나가며
공적생활과 영역에 대한 고려와 관심과 인식이 더 이상 불필요해진 상황에서 ‘인간의 사생활화(privation)’의 심화는 가치관의 개인화 및 나아가 사회규범의 붕괴를 가져오게 되었다. 공적영역이 소거되고 개인의 삶에 –타인과 공동체와 사회 전체를 생각하지 않고 오로지 자신만 생각하는- 지극히 철저한 사생활만 남게 되자, 개개인의 몰가치적 사고 및 행위양식과 탈규범적 사고 및 행동방식을 규제하여 사회 전체의 안정을 도모해주던 공공규범/사회규범들 역시 무너지면서 전체적으로 사회 아노미 현상이 초래되었다. 매개구조의 해체를 통해 발생한 사회구성원들의 사적영역과 공적영역 간의 단절과 분리가 최종적으로 사회의 안정과 통합을 위협하는 상황에 이르게 된 것이다.
근대화와 산업화의 과정을 거치며 대거 소멸되었던 매개구조 혹은 중간구조에 대한 시민사회적 차원의 복원 필요성과 중요성이 부각되는 것은 바로 이런 이유에서다. 국가와 사회의 입장에서 본다면, 국가 및 사회는 건실한 매개구조를 통해 비로소 사회안정과 통합을 이룰 수 있다. 한 걸음 더 나아가, 관료화되고 비대해진 거대구조인 국가로부터 단절 및 분리되었던 개인과 시민들의 의견들이 수렴되는 통로의 역할을 하는 매개구조의 존재는, 보다 민주적이고 건강한 사회의 수립에도 긍정적으로 작용하게 된다. 개인과 국가 사이에 놓인, 주민조직과 시민단체 등의 매개영역이 두텁고 다채로우며 활성화될수록 그 사회의 자유와 민주 등은 깊이 뿌리 내리고 결실을 이룰 수 있는 것이다.
  • 시흥시 ‘희망마을 네트워크’ 주민 정기 모임 (출처: 시흥시도시재생지원센터 홈페이지)

동서대 국제관계학 전공 김성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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