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해 전의 일이다. 오위산(吳爲山, 1962~) 교수의 초청으로 북경을 방문한 적이 있다. 당시 오 교수는 세계를 무대로 활약하는 조각가이자 남경대 교수로, 중국조소원 원장으로 왕성한 활동을 펼치고 있었다. 일행이 방문한 때는 국내외 언론의 주목을 받으며 천안문 동편, 국가박물관 북측에 세워졌던 오 교수의 대형 공자상이 논란 끝에 철거되는 홍역을 겪고 난 직후였다.
식사 중에도 끊임없이 울려대는 휴대폰에 응대해야 할 정도로 바쁜 그였지만, 북경에서의 여정은 유쾌했고 대화는 즐거웠다. 방문 첫째 날, 모 신문사의 송년 행사(중국에서 송년 행사는 주로 설 직전인 1월이나 2월에 진행된다)를 마치고 찾은 중국조소원의 작업실에서 공자가 노자에게 도를 묻는 장면을 담은 수묵화를 그리며 그가 보여준 예술가의 풍모는 잔잔한 감동으로 여태 기억 속에 남아있다. 몇 해 사이 중국정치협상회의(정협) 상무위원이자 중국미술관 관장의 직책을 더해 이전보다 더 바쁜 일정을 소화하고 있는 오위산 교수가 한-중 국가예술교류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개최된 특별전으로 한국을 찾았다.
“같고도 다른: 치바이스와 대화”(似與不似: 對話齊白石). 지금 예술의전당 서예박물관 2층에서 진행되고 있는 특별전의 제목이다. 호남성 상담(湘潭)에서 가난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나 목공으로 일하며 독학으로 그림을 그리기 시작한 ‘중국의 피카소’ 제백석(1864~1957)은 근현대 중국을 대표하는 예술가이다. 1949년 10월 1일, 모택동이 천안문 망루에서 중화인민공화국의 건국을 선포하던 역사적인 순간을 바로 옆자리 서서 함께 지켜본 사람들 가운데 하나가 제백석이었다. 화가이자 서예가, 전각가로도 명성을 얻은 그의 작품들은 상상하기 어려운 가격으로 거래되고 있다. 2011년 <송백고립도(松柏孤立圖)>가 4억 2,550만위안(718억원)에 경매에서 낙찰되었을 때 충격에 빠진 미술계는 중국의 산수를 담은 12폭 병풍인 <산수십이조병(山水十二條屛)>이 2017년 경매에서 9억 3,150만위안(1,533억)에 낙찰되었다는 소식에 할 말을 잊고 말았다.
이미 2017년에 개최된 전시회를 통해 제백석의 예술 세계에 대한 한국인의 각별한 애정과 관심은 한 차례 입증된 바 있다. 이번 특별전에서는 중국미술관에 소장된 400여 점에 달하는 제백석의 작품들 가운데 최고작 81점과 함께, 제백석에게 영향을 미친 팔대산인(八大山人) 주탑(朱耷, 1626?~1705?)과 오창석(吳昌碩, 1844~1927), 그리고 제백석으로부터 영감을 받은 후배 작가들의 수묵화, 유화, 조각 등 총 116점이 전시되고 있다. 하나같이 중국미술관이 소장하고 있는 명품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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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고도 다른: 치바이스와 대화” 특별전에서 전시되고 있는 <화훼초충도>. 제백석 作, 중국박물관 소장 (사진출처)
개인적으로 처음 실견하는 제백석 작품들의 붓놀림은 놀라웠다. 수염 한 올 한 올까지 기운이 생동하는 그 유명한 새우와 게 그림, 팔십을 훌쩍 넘긴 고령에 그린 화훼초충도임에도 더없이 화사한 색감과 세밀한 묘사를 보여주는 매미며 잠자리, 메뚜기, 사마귀, 가재 등은 절로 탄식을 자아냈다. 또 제백석을 중심으로 선후배 작가들의 작품을 같은 공간에 전시함으로써 중국 문인예술의 핵심 가치인 사의(寫意. 내면세계를 표현한다는 의미로, 사물 묘사에 치중하는 ‘형사(形似)’와 대비된다)의 전통이 어떻게 형성되고 계승되어왔는지를 보여주는 것이 이번 특별전의 의도임을 짐작할 수 있다. 오창석의 작품들과 유사한 제재와 구도를 가진 제백석의 작품들을 나란히 배치하여 그 같고 다름을 직관적으로 이해할 수 있게 배려한 부분은 특히 인상적이다.
이번 특별전에서는 팔대산인과 오창석, 제백석 같은 선배 대가들의 작품들 사이에서 오위산의 조각 작품들이 빛을 발하고 있다. 오위산은 수많은 역사 인물과 명사들의 내면세계를 특유의 질감으로 빚어낸 조각상을 제작하면서 명성을 얻었지만, 제백석에 대한 애정은 각별하다. 우선 몸통을 비우고 윤관만을 드러낸 파격적인 구도의 제백석이 전시장 입구에서 관람객을 맞이한다. 또 오른팔로 긴 지팡이를 안은 채 물끄러미 세상을 관조하는 듯한 <화가 제백석> 등 여러 조각상들이 서화 작품들과 아우라를 주고 받으며 전시장에 팽팽한 긴장감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남경대학 작업실과 북경의 중국조소원에서 오위산의 작업 과정을 지켜본 바 있고 도록을 통해 그의 수많은 작품들을 감상하였지만, 그의 조각이 추구하는 ‘사의’의 연원이 어디에 있는지 이번 전시회를 통해 비로소 여실하게 이해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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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특별전에서 전시되고 있는 <제백석>과 <화가 제백석>.
오위산 作, 중국박물관 소장, 필자 사진. (사진출처)
이번 특별전은 한국과 중국의 국가예술교류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기획되고 실행되었다는 점에서 그 의미가 각별하다. 예술의전당에서 “같고도 다른: 치바이스와 대화” 특별전을 마치고 나면, 5월부터는 중국미술관에서 추사 김정희의 특별전이 열리고 같은 작품들은 다시 한국에서의 순회 전시회를 통해 관람객들을 맞는다. 이 전시회의 제목은 “추사 김정희와 청조 문인의 대화”이다.
한-중 예술교류 프로젝트에서 제백석과 짝을 이룰 우리 측 예인으로 추사 김정희(1786~1856)가 선정된 것에 의문을 제기할 이는 많지 않을 것이다. 김정희는 우리 전통 예술에서도 한 정점에 있을 뿐 아니라 청의 문인·예술가들과의 직간접적인 교류를 통해 동아시아 예술사에 의미 있는 자취를 남기고 있기 때문이다. 김정희의 인생과 예술 여정에서 결정적인 변곡점을 마련한 사건은 그의 나이 24세인 1809년 10월의 연경 여행이었다. 동지부사로 사절단을 이끈 아버지 김노경(1766~1837)의 자제군관 신분으로 연경을 찾은 김정희는 몇 가지 행운까지 겹쳐 당대 최고의 명사들과 학문적, 예술적 교류의 기회를 갖고 친분을 쌓을 수 있었다. 담계(覃溪) 옹방강(翁方綱 1733~1818), 운대(芸臺) 완원(院元 1764~1849)을 비롯한 문인·예술가들과의 만남이 김정희에게 얼마나 큰 영향을 미쳤는지는 그의 아호인 보담재(寶覃齋)와 완당(阮堂)만으로도 넉넉히 짐작할 수 있다.
청 경학의 권위자이자 추사 연구의 최고봉으로 일컬어지는 일본인 후지쓰카 지카시(藤塚鄰, 1879~1948)는 북경 유리창과 서울 인사동에서 수집한 방대한 자료에 대한 분석을 바탕으로 조선 북학파와 그 연원으로서의 청조학에 대한 연구를 진행했다. 이 연구를 통해 북학파를 개척한 홍대용과 박제가, 그리고 그의 제자인 김정희를 비롯한 인물들이 청의 학자들과 교유하고 영향을 주고받은 내력을 소상히 밝혀냈다. 경성제국대학의 철학과 교수로 <세한도>를 소유했다가 현해탄을 건너온 소전 손재형의 간절함에 탄복하여 대가없이 <세한도>를 넘겨준 바도 있고, 사후인 2006년에 평생에 걸쳐 모은 추사 관련 자료 1만 5,000여 점을 아들 후지쓰카 아키나오(藤塚明直)를 통해 과천 추사박물관에 기증하기도 하였다. 평생을 청조학과 북학파, 그리고 추사 연구에 바쳐온 후시쓰카는 동경제국대학 박사학위논문 <조선조에서 청조 문화의 이입과 김완당>에서 “청조학(淸朝學) 연구의 제일인자는 추사 김정희이다”라고 서술한 바 있다.
1840년 6월, 당시 병조참판이었던 55세의 김정희는 동지부사로 임명되었다. 동지부사였던 아버지의 자제군관으로 연경을 방문한지 정확히 30년 만에 그토록 간절하게 소망해오던 두 번째 연경행을, 그것도 동지부사의 자격으로 이룰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러나 김정희는 안동 김씨 세력과의 당쟁에 휘말려, 연경 대신 제주도에 유배되어 위리안치 상태도 10년을 보내야했다. 그리고 사후 200여년이 지난 올해에야 비로소 김정희의 두 번째 연경행이 국가예술교류 프로젝트라는 이름으로 성사될 수 있게 되었다. 신동으로 명성을 날리며 이미 여섯 살에 쓴 ‘입춘대길(立春大吉)’ 글씨로 명필 신화를 낳은 김정희. 우리가 자긍심을 담아 ‘추사체’라고 부르는 그의 유티크한 글씨와 그림들이 전통 서화의 본고장 사람들에서 어떤 평가를 받게 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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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동대문디자인플라자(DDP)에서 진행 중인
3·1운동 100주년 간송특별전 “대한콜렉숀”에 나란히 전시된 <침계>와 <대팽고회>.
김정희 作, 간송미술관 소장, 필자 사진. (사진출처)
올해는 중화인민공화국이 건국한 지 70주년이 되는 해이다. 한국에서도 새 정부의 집권 중반기를 맞이하면서 한-중 관계의 회복에 대한 기대감이 어느 때보다 커져가고 있다. 하지만 한-중 관계는 사드 여파로 초래된 경색 국면을 여전히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사드 문제가 한창 부각되던 2014년 무렵 중고등학교에 다니던 아이들이 대학에 입학하기 시작하면서, 이런 한-중 관계의 경색 국면은 국내 대학 중국 관련 학과들의 입시 경쟁력에까지 영향력을 미치고 있는 실정이다. 한 해 동안 서해를 넘나들며 예술의전당에서 진행되고 있고 중국미술관에서 진행될 두 차례의 ‘대화’를 통한 예술 외교가 이런 경색 국면을 돌파할 마중물이 될 수 있을지 관심을 가지고 지켜볼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