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평: 근대중일 어휘교류사(近代中日語彙交流史) - 신한자어의 생성과 수용*
『근대중일어휘교류사』는 선궈웨이(沈國威) 일본 간사이 대학 교수의 저서이다. 제목에서도 알 수 있듯이, 저자는 이 책에서 근대 시기 중국과 일본 간의 어휘 교류 역사에 대해 다루고 있다. 선궈웨이 교수는 랴오닝성(遼寧省) 선양(瀋陽) 출신으로 베이징 일본학연구센터 대학원을 거쳐 오사카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이 책은 선 교수가 1992년 오사카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논문을 수정 보완한 것이다. 그는 중일 어휘 교류사 연구에 있어서 가장 선두에 서 있는 학자이며 이 책은 발간 당시 일본학계에서 큰 반향을 일으켰다. 2012년 고려대학교 출판부에서 번역본을 출판하여 한국 독자들도 그의 연구를 접할 수 있게 되었다.
중국어와 일본어를 살펴보면, 두 언어에 상당히 많은 한자 동형어가 존재하는 것을 알 수 있다. 특히 서양의 근대지식을 받아들이기 위해서 중국과 일본에서 새롭게 고안된 수많은 한자어는 양국의 어휘교류를 통하여 서로의 언어에 정착하였고, 후에 한국을 포함한 한자문화권 국가에도 전파되어 동아시아의 공유자산으로 자리 잡게 된다. 예컨대 ‘抽象(추상)’, ‘主觀(주관)’, ‘哲學(철학)’ 등과 같은 한자어가 여기에 속한다.
그런데 조금 특이한 예로 ‘革命(혁명)’, ‘社會(사회)’, ‘經濟(경제)’와 같은 한자어는 일찍이 중국 고전에 등장했었고 그 의미도 지금과는 달랐지만, 여기에 새로운 의미가 부가되면서 오늘날에는 현대사회와 관련된 개념을 나타내고 있다. 그리고 이 고전어를 가져다가 번역어로 사용한 것은 중국인이 아니라 바로 일본인이었다. 이 책은 중일 양국에서 사용되고 있는 이러한 한자어의 기원에 대한 실마리를 찾고자 근대 시기(아편전쟁부터 제2차 세계대전까지) 양국의 여러 문헌들을 철저하게 고증함으로써 서양의 신개념을 나타내는 용어를 번역한 주체는 누구였고 어떠한 고민을 통해 번역되었으며, 이를 양국이 공유하게 된 경로에 대하여 살펴보고 있다. 그리고 중일 양국 간의 어휘 교류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동아시아에서 한자라는 매개체를 사용하여 서양의 근대 문명을 어떻게 해석하고 수용하였는지를 보여주고 있다. 따라서 이 책은 비단 어휘교류에 대한 언어학적 접근뿐만 아니라 이를 통하여 동아시아 근대 지식 형성의 한 단면을 엿볼 수 있다는 점에서 그 의미가 크다고 할 수 있다.
『근대중일어휘교류사』의 구성과 내용을 우선 살펴보면, 이 책은 크게 연구편(硏究編), 어지편(語誌編), 자료편(資料編) 세 부분으로 되어 있다. 어지편은 저자가 선정한 어휘에 대한 설명과 해제가 실려 있으며, 자료편 역시 어휘 목록을 수록한 것이기 때문에 여기서는 저자의 연구 성과를 다루고 있는 연구편을 주로 소개하도록 하겠다. 연구편은 서론을 제외하고 모두 5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제1장 일어 차용어 연구 개설
1950년대 말부터 중국에서도 일어 차용어에 대한 논의가 뜨겁게 진행되었다. 그만큼 학자마다 ‘일본어에서 빌려 온 어휘’를 무엇으로 규정지을 지에 대해 다른 의견을 갖고 있었다. 앞서 지적한 바와 같이 일어 차용어는 중국어와 표기가 같고 음성차용은 없다는 점에서 다른 언어의 외래어와는 다른 모습을 띠고 있다. 이처럼 외형이 같고 음성도 중국 고유의 것이므로 중국학자들이 이를 외래어로 보기는 쉽지 않았을 것이다. 1장에서는 일본차용어를 바라보는 중국학자들의 다양한 시각과 외래어에 대한 선 교수의 정의를 소개하고 있다.
제2장 중국의 일어 차용어 연구사
중국의 일어 차용어 연구사를 시기별로 나누어 소개하고 있으며 주요 연구 성과물 간의 관련성과 진척도를 연결시켜 설명하고 있다. 초기연구로는 1915년 彭文祖의 『盲人瞎馬之新名詞』가 있으며 5·4운동 전후 번역어와 학술 용어에 대한 관심이 증대되면서 나온 번역어 연구인 余又蓀(1935)도 소개되고 있다. 1930년대 후반 중일전쟁이 발발하면서 이 방면의 연구는 중단되었다가 중화인민공화국 건국 후 1956년부터 중국의 문자 개혁 및 언어규범화 운동이 일어나면서 일어 차용어는 다시 논의의 중심이 되었다. 이때, 王立達(1958)를 시작으로 高名凯·刘正埮(1958) 『現代漢語外來詞硏究』와 후속 연구인 『漢語外來語詞典』(1984)이 나오는데 저자는 이들 연구에 대해서 자세히 살펴보고 있으며, 같은 시기 일본에서 진행된 관련 연구도 간략하게 소개하고 있다. 이처럼 일어 차용어 연구가 역사적 흐름에 따라 중단되거나 활발히 진행되었던 당시 시대적 현실을 함께 소개하고 있어 어휘연구사 뿐만 아니라 당시 중국 내 정치적 현실도 이해할 수 있다.
제3장 일본어와 중국어의 만남-근대 전기 중국 지식인과 일본어
3장에서는 메이지 유신 전후로 일본을 방문했던 중국인의 저술을 고찰하여 근대 전기 중국 지식인들이 어떻게 일본어와 접촉하였고, 이러한 접촉이 있었음에도 당시 일본어의 유입이 발생하지 않은 이유에 대하여 다루고 있다. 당시 저술은 대부분이 고위관리나 상인 사이에서 이루어졌기 때문에 일본어가 일반 언어사용자들에게까지 유입되고 널리 보급될 가능성은 희박하였다. 또 한 가지는 선 교수가 언급한 것처럼 “언어를 차용하는 동기를 유발하는 것은 상대 언어로 대표되는 문화에 대한 동경심이다. 그러나 근대 전기 중국인들이 일본 문화를 동경한 적은 없었다”는 점이다. 그러니 당시 일본어휘가 중국으로 수용될 문화적 동기는 없었다.
이 장에서 또 한 가지 흥미롭게 살펴볼만 한 것은 당시 중국인들이 일본에 가서 일본이 실제 사용하고 있는 한자어를 보고 혼란스러움을 감추지 못하는 모습이다. 가령 傅雲龍은 급진적인 시각을 갖고 있어서 일본을 돌아본 후 ‘일본을 세계로 나가는 문으로 삼아야할 것’이라고 주장하면서도, 다른 중국 지식인들과 마찬가지로 일본어가 한자를 사용한다는 이유로 일본어를 방언의 한 종류로 간주하였다. 이러한 생각은 한자가 중국만의 전유물이며 한자를 사용한다는 것은 곧 중국에 속한다는 착각에서 비롯된 것이다. 앞서 살펴본 것처럼 일본에서 번역한 한자어 용어를 중국이 재수용하였다는 사실을 인정할 수 없었던 초기 중국 연구자들이 연구를 진행할수록 일어 차용어가 대량 존재한다는 사실을 확인하면서도 끝내 보수적인 입장을 취하는 모습과 이러한 폐쇄적 인식을 바탕으로 각종 저술 과정에서 겪는 여러 가지 당혹스러움과 모순점을 엿볼 수 있다.
제4장 서학동점과 일어 차용어
여기서는 명나라 말에 중국에 온 서양 선교사들이 구축한 양학(洋學)이 중국과 일본에 미친 영향에 대하여 이야기하고 있다. 서양 선교사들은 포교를 위해서 언어 장벽을 극복해야했고 이를 위해 중국어 및 방언과 관련한 사전과 문법서를 편찬하였다. 이들은 완성도 높은 번역물과 저서를 내놓았고 여기서 선보인 번역어들은 후에 일본에서 서양의 문물을 수용하면서 번역어를 만들 때 중요한 참고자료가 되었다. 심지어 중국학자들이 일본에서 왔다고 믿었던 한자어 번역어가 사실은 선교사들의 저작물에서 이미 존재하는 경우도 많다는 사실을 저자는 면밀한 고찰을 통해 입증하고 있다. 그만큼 중국 양학서 어휘는 양국의 근대 어휘 형성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특히 대부분의 기독교 용어들이 새롭게 고안된 것이 아니라 중국 고문헌에 이미 존재했던 한자어에 기독교 개념이 더해져서 사용된 것임을 지적하고 있다. 새로운 용어를 만들지 않고 기존의 어휘에 새로운 개념을 부가하는 것은 언어의 경제원칙에도 부합하는 매우 효율적인 어휘 생산 방식이다. 한편 일본인들이 중국의 고전어를 개조하여 근대 번역어로 만든 예도 많은데 이 장에서는 이러한 예들을 살펴보고 그 기원을 제시하고 있다.
제5장 중국어의 일본어 어휘 수용
근대 중국어는 서양의 신개념을 표현하는데 충분한 어휘를 가지고 있지 못했으며 이러한 공백을 채우기 위해 일본에서 만든 번역어를 상당부분 차용하였다는 것이 저자의 주장이다. 이 차용어들은 기존 중국 고전어에 새로운 의미를 부가한 것이었기 때문에 언어 체계 전체에 연쇄적 영향을 주는 것은 필연적인 결과였다. 마지막 장에서는 중국어가 일본 어휘를 수용한 과정과 이러한 유입이 어휘체계 전반에 어떤 변화를 가져왔는지에 대하여 ‘關係(관계)’와 ‘影響(영향)’ 두 단어를 중심으로 고찰하였다. 그러나 저자가 지적한 바와 같이 어휘의 의미 변화를 더욱 폭넓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20세기 이후 서적과 사전류를 근대 전기 영중사전류와 대조하는 작업이 필요하며 일어와 중국어의 공시적 어휘대조 역시 향후 이루어져야할 작업이다. 이 부분에 대한 선 교수의 차후 연구를 기대해 볼 수 있겠다.
본 서평에서는 이 책의 연구편을 주로 다루고 있으나 어지편과 자료편의 분량은 연구편을 압도할 만하다. 비단 양적인 분량만이 아니라 그 연구결과물로서의 가치에 있어서도 그러하다. 어지편에서는 근대시기 중국과 일본에서 발간된 25권의 문헌을 고찰하여 102개 한자어의 역사를 상세히 기술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자료편은 90년대 연구물에 수록된 일어 차용어 어휘와 해당 한자어의 원어, 품사, 단어 발생국 분류, 원 출전 자료명, 단어 조어 패턴, 의미분류를 상세히 정리하였다. 선 교수가 방대한 문헌자료에 대해 얼마나 철저하고 세밀한 고증과 비교분석을 진행하였는지 알 수 있다. 같은 어학 연구자로서 그의 책을 읽으면서 여러 번 진심어린 존경의 뜻을 전하게 된다.
앞에서 살펴본 것처럼 중국과 일본의 어휘교류사는 다른 언어들이 접촉을 통해 외래어를 수용하고 사용하는 형태와는 다른 모습을 보이고 있다. 그것은 두 나라 모두 한자를 사용한다는 공통점 외에도 중국 고전 문화를 공유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이는 한자문화권에 속하는 한국도 예외는 아니다. 『근대중일어휘교류사』를 통하여 우리가 현재 사용하고 있는 한자어가 어디에 기원을 두고 있고, 어떠한 역사적 배경을 통해 고안되고 번역되었는지 그 발자취를 살펴볼 수 있는 재미가 있다. 물론 어학연구자가 아닐 경우 학술적인 접근 부분에서는 생소하고 어렵게 느껴질 수 있지만 말이다. 그러나 작게는 우리가 평소 사용하는 개별 한자어들의 유래를 확인할 수 있으며, 크게는 어휘교류가 이루어져야만 했던 중일 관계, 더 나아가 근대화를 위해 부단히 힘쓰던 중국과 그 속에서 고민하는 중국 지식인의 모습을 살펴볼 수 있는 것은 이 책을 통해 얻을 수 있는 가장 큰 수확일 것이다.
중국어학계나 국어학계에서도 한자어 연구는 상당히 활발하게 진행되고 있는 연구주제이다. 따라서 넓은 의미에서 『근대중일어휘교류사』가 한국에 번역본으로 발간된 것은 중국어학, 국어학계 뿐만 아니라 동아시아 근대 지식 형성에 대해 관심을 갖고 있는 연구자들에게 더없이 귀중한 자료가 아닐까 생각한다. 이 책은 일본에서 활동 중인 중국인 학자가 언어학적 시각에서 근대 서양지식 수용에 따른 어휘 교류사를 바라본 것이다. 이와 달리 서양 학자의 시각에서 서술된 페테리코 마시니의 『근대 중국의 언어와 역사-중국어 어휘의 형성과 국가어의 발전:1840~1898』도 함께 읽어보길 권한다. 또한 근대문학 형성과 제도화에 초점을 맞춘 리디아 리우의 『언어 횡단적 실천』도 흥미롭게 읽어볼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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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글은 『CHINA 연구』 제17집(2014)에 실린 서평 「近代中日語彙交流史」을 수정 보완한 것임.
부산대학교 중어중문학과 부교수 이지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