끝나지 않은 홍콩 시위의 미래
2019년은 아마도 홍콩 역사상 가장 격렬했던 한 해로 기록될 것이다. <범죄인 인도 조례> 수정안에 반발하며 지난 3월 말부터 발생한 시위는 6월 16일 홍콩 전체 인구의 약 30%에 이르는 200만 명을 거리로 뛰쳐나오게 했으며, 3달이 넘게 지난 지금까지도 좀처럼 진정될 기미를 보이지 않고 있다. 무엇이 홍콩인들을 이렇게 격분하게 하였으며, 앞으로 시위는 어떤 방향으로 전개될 것인가?
전 계층을 아우르는 ‘분노의 외침’
이번 <범죄인 인도 조례> 수정 이슈는 지난 2월 대만에서 홍콩인 남성이 같은 홍콩인 여자친구를 살해하고 홍콩으로 도주한 데서 시작됐다. 대만 정부는 이 용의자의 인도를 요청했지만 홍콩은 속지주의 법을 적용하고 있고, 대만과 범죄인 인도 협약을 체결하지 않았기 때문에 이 남성을 살인죄로 처벌하거나 대만으로 송환할 수 없었다.
홍콩 정부는 이를 빌미로 중국 본토, 마카오, 대만 등과 범죄인 인도조약을 체결하는 <범죄인 이도 조례 수정안>을 입법하려 했다. 많은 시민들이 우려했던 것은 이 용의자 인도를 사법부가 아닌 홍콩 행정장관이 심의한다는 데 있었다. 선거인단 1,200명의 간선제 투표로 선출되는 임기 5년의 홍콩 행정장관은 중국 중앙정부가 임명한 후보 중에서 뽑히기 때문에 항상 친중 성향이 강한 후보가 선출되며, 향후 친중파 행정장관이 중국 중앙정부의 지시에 따라 반중 인사나 인권운동가 등을 중국 본토로 송환하게 될 것을 우려한 시민사회 각계가 시위를 통해 수정안 통과 저지에 나서게 된 것이다.
특히 이번 ‘반송중(反送中: 중국 송환 반대)’ 시위는 기독교, 천주교 등 주요 종교계의 지지 선언과 교사들의 휴업, 변호사협회의 ‘침묵시위’(6월 6일, 주 최 추산 3천 명), ‘엄마들의 시위’(6월 13일, 추최측 추산 6천 명)’, 노년층의 ‘백발 시위’(7월 17일, 추최 추산 9천 명), 해외 홍콩인들의 지지시위에 이르기까지 전 계층을 망라한 거대한 사회운동으로 발전했으며, 홍콩 언론에서는 7월부터 이를 ‘역권운동(逆權運動: 권력에 저항하는 운동)’이라 부르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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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3-7월 주요 '반송중' 시위 참가인 숫자
왜 홍콩 청년들은 ‘반중(反中)’이 될 수밖에 없었나
지금까지 홍콩인들은 실용적이고 상대적으로 정치에 무관심한 것으로 알려져 왔다. 무엇이 이들을 이토록 분노하게 만들었을까? 특히, 이번 시위의 주요 동력이라 할 수 있는 청년층들은 왜 중국에 이리도 큰 반감을 가지고 있는 것일까? 이번 시위의 배경에는 중국 반환 이후 설 자리를 잃은 홍콩 청년들의 분노가 담겨 있다.
홍콩의 중국 반환은 홍콩에게 경제적 발전의 기회를 가져다 주기도 했지만, 반대로 심각한 부담을 안겨 주기도 했다. 반환 이후 홍콩 사회가 떠안게 된 가장 대표적인 부담으로는 본토 출신 인력의 유입과 부동산 가격의 상승을 들 수 있다.
더 나은 취업 기회를 찾아 홍콩으로 이주한 중국 본토 출신의 이른바 ‘신이민자(新移民)’들은 20여년 동안 약 100만 명으로 추산되며, 이는 730만 홍콩 인구의 14%에 달한다. 또한 폭증하는 중국 관광객들로 인해 홍콩의 산업 구조는 관광, 귀금속, 소매업 등이 지나치게 발달한 기형적인 구조로 변했으며, 홍콩 영주권 획득을 목적으로 하는 본토 출신들의 ‘원정출산’ 및 본토에서 금지된 부동산 영구 소유를 위한 투기 역시 빈번하게 이루어지고 있다.
본토 출신 노동자들의 유입과 관광, 소매 등 저임금 단순 서비스업 일자리 증가 등으로 인해 1997년 15,457홍콩달러(약 232만 원)였던 대졸 초임 평균 월급은 2017년 14,395홍콩달러(약 217만 원)로 오히려 낮아졌고, 막대한 중국발 투자 자금이 홍콩으로 유입됨으로 인해 집값은 천정부지로 치솟았다. 비단 취업, 주택뿐만 아니라 의료, 교육 등 사회 모든 영역에서 홍콩의 젊은이들은 중국 출신 ‘외지인’들과 파이를 나눠야 하는 상황에 처해 있다.
또한 중국 정부는 이제 겨우 맹아(萌芽)를 틔운 홍콩 시민사회를 강하게 압박하며 민주화 요구에 ‘철퇴’를 내리고 있다. 특히 2014년 행정장관 직선제를 요구하며 벌어졌던 ‘우산혁명’ 시위에 대한 강경 진압과 강성 친중파인 캐리 람 정부 출범 이후 홍콩 정부는 브레이크 없는 친중 일변도 정책을 쏟아내 왔다.
이처럼 홍콩 젊은이들에게 ‘중국’은 동포라기보다는 경제적으로는 ‘착취자’로, 정치적으로는 ‘압제자’로 비춰지고 있으며, 정치적, 경제적 압박에 대한 출구가 철저히 봉쇄된 상황에서 젊은 층의 분노는 이미 극에 달해 언제 터져도 이상하지 않은 ‘시한폭탄’과 같은 상황이었다.
이번 시위는 좁은 의미에서는 캐리 람 정부의 브레이크 없는 중국화 정책에 대한 홍콩인들의 반발이며, 넒은 의미로는 중국 반환 이후 22년간 쌓여 있던 홍콩 사회 내부의 우려와 갈등이 집약돼 폭발한 것으로 볼 수 있다.
’폭력’ 경찰과 ‘불통’ 정부, 기존 권력에 대한 불신으로 이어져
이번 시위를 기점으로 경찰에 대한 홍콩 시민들의 신뢰도는 땅에 떨어졌다. 특히 이번 <조례 수정안> 이슈와 관련해 경찰과 시위대간 물리적 충돌이 최초로 발생한 6월 9일 시위에서 경찰은 시위대를 향해 최루탄을 던지거나 머리를 겨냥해 고무탄을 쏘는 등 홍콩 역사상 유례없는 방법으로 시위를 강경 진압했다. 또한 이후 여러 차례의 시위에서 경찰이 위임증(委任證: 경찰 신분증)을 휴대하지 않았거나 경찰 제복을 입지 않은 경우, 제복에 쓰여 있는 식별번호와 실제 인원이 일치하지 않았던 경우가 다수 목격됐다.
시위대 측은 이같은 의혹에 대해 홍콩에 주둔하고 있는 중국 인민해방군이 동원된 것은 아닌지 의심하고 있다. 또한 일부 시민들은 경찰이 시위 때마다 시위대 내에 사복 경찰을 잠입시키거나 폭력조직인 흑사회(黑社會) 인원들을 동원해 시위를 폭력적으로 변질시켰다는 의혹도 제기하고 있다.
이번 시위를 촉발시킨 <범죄인 인도 조례 수정안>에 대한 캐리 람 행정장관의 발언 역시 홍콩 시민들의 입장에서는 ‘기만’에 가깝다. 6월 19일 200만이 참여한 평화시위에도 람 장관은 ‘시민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지 않은 것에 대해 사과한다’는 성명만을 발표했을 뿐, 시민들이 요구하는 조례안 완전 철폐에 대해서는 ‘임기 내 추진하지 않을 것’이라는 두루뭉술한 답을 내놓았다.
홍콩 정부가 조례 수정안 폐지에 대한 명확한 답을 내놓지 않자 결국 7월 1일 시위에서는 분노한 시민들이 입법회를 점거하는 초유의 사태가 발생했음에도 람 행정장관은 7월 9일 기자회견에서 수정안이 ‘수명을 다했다(壽終正寢)’는 모호한 수사로 시위대가 요구한 ‘철회(撤回)’라는 단어를 사용하는 것을 회피해 시민들의 분노를 샀다.
이로 인해 6월 홍콩대학교가 실시한 설문조사에서 람 장관에 대한 홍콩 시민의 평점은 32.8점, 지지율 23%로 해당 조사가 시작된 1992년 이래 역대 최저치를 기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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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콩 역대 행정장관 최저 평점 비교
홍콩 최대의 방송국인 TVB의 편파 보도 역시 시위대들을 격분하게 하고 있다. TVB에서는 홍콩 정부 입장을 충실히 반영해 시위대의 폭력적인 면을 부각시키는 편파적인 보도를 쏟아내고 있으며, 이를 통해 TV 의존도가 높은 장, 노년층을 시위에서 유리시키려는 시도를 계속하고 있다.
이처럼 이번 충돌을 통해 정부, 경찰, 언론 등 기존 권력에 대한 홍콩인들의 불신은 심화되고 있으며, 친정부파와 반정부파의 충돌 역시 더욱 거세지고 있다.
‘역권운동’, 제2의 ‘우산혁명’으로 끝날 것인가
홍콩 정부는 현재 다수 시민들의 의견을 ‘일부 극렬분자의 소행’으로 치부하며 귀를 막고 있다. 6월 이후 정부 청사가 위치한 애드미럴티 일대는 주말마다 친(親)정부파와 민주파의 시위로 몸살을 앓고 있다. 시위를 주도하고 있는 시민단체인 민간인권전선(民間人權陣線)은 매주 일요일 홍콩 각지에서 시위를 조직할 예정이라 밝혔으며, 정부 지지파 역시 민주파에 비해 인원수는 적지만 매주 토요일마다 시위에 나서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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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콩각지에 설치된 민주화 염원 벽보. 반대파에 의한 훼손이 빈번하게 일어나고 있다
7월 중순 이후부터는 양측 시위대가 서로 물리적으로 충돌하는 상황도 속속 발생하고 있다. 초기에는 반대파의 벽보를 훼손하거나 반대파 시위대를 큰 소리로 위협하는 것에서 그쳤지만, 지난 21일 윈롱(元朗)에서는 흰색 옷을 입은 친중파 시위대 1,000여 명이 거리를 활보하며 검은색 옷을 입었다는 이유만으로 시민들을 무자비하게 폭행하는 사건까지 벌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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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월 21일 친정부 시위대(흰색 옷)가 검은 옷을 입은 시민에게 폭력을 행사하는 모습
이러한 ‘강대강(强對强)’ 대치 상태는 어느 한쪽이 물러서지 않는 한 앞으로도 계속될 것으로 보인다. 다만 기존의 비폭력 시위를 지지하던 중도층들이 시위가 장기화되면서 피로감을 느끼고 있고, 사태를 숨죽이고 지켜보고 있던 친중파 역시 7월 이후에는 조직 역량을 총동원해 여론전에 나서고 있다는 점에서 이번 시위가 자칫 ‘우산혁명’ 시위처럼 별다른 성과 없이 흐지부지 끝날지도 모른다는 비관적 의견도 나오고 있다.
하지만 이번 시위를 촉발시킨 <범죄인 인도 조례>에 대해 홍콩인들이 체감하는 공포감은 ‘우산혁명’ 때와는 비교할 수 없이 크다. ‘우산혁명’이 홍콩인들이 전에 가져보지 못했던 ‘행정장관 완전 직선제’라는 다소 추상적인 권리에 관한 것이었다면, <범죄인 인도 조례>는 홍콩인들이 본래 가지고 있는 자유에 대한 심각한 훼손이자 도전이기 때문이다. 만약 이 조례가 통과될 경우 본인이나 가족, 친구가 정치적인 이유로 중국 본토로 압송될지 모른다는 불안감이 홍콩인들을 거리로 나서게 만들고 있는 것이다.
실제로 많은 홍콩인들이 페이스북, 인스타그램 등 SNS를 통해 시위 상황을 실시간으로 지켜보고 있고, ‘이번에 조례 수정안의 완전 철회에 성공하지 못하면 홍콩에 더 이상 희망은 없다’는 절박한 메시지를 통해 주변의 참여를 독려하고 있다. 시위가 본격적으로 격화된 지 2달이 지난 지금에도 식지 않는 참여 열기는 우산혁명 시기와는 분명한 차이를 보이고 있다.
중국의 동화 정책, 홍콩 시민의 힘으로 막아낼 수 있을까
홍콩은 개혁개방 이후 선전(深圳) 등 인접 경제특구의 발전을 촉진시키고 외자를 유치하는 ‘마중물’ 역할을 해 왔지만, 중국 본토가 급격히 성장하면서 홍콩이 중국 전체 경제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지속적으로 축소됐다. 급기야 2018년에는 선전의 GDP가 홍콩을 앞지르는 등 홍콩이 차지했던 특별한 위상은 사라지고 있다.
이러한 배경에서 중국 중앙정부는 시진핑(習近平) 집권 이후 홍콩을 중국으로 완벽하게 흡수시키기 위해 대외적으로는 ‘중영공동선언은 무효이며, 홍콩 문제는 중국의 내정’이라고 여러 차례 언급해 서방, 특히 영국의 개입을 원천 차단하려 하고 있으며, 내부적으로는 ‘일국양제’를 무시하고 홍콩을 중국에 빠른 속도로 동화시키려는 여러 조치를 취하고 있다.
실례로 지난해 개통한 광저우-홍콩 고속철도의 홍콩 종점인 웨스트 카우룬(西九龍)역의 플랫폼을 중국 정부의 관할로 사용할 수 있게 허가한 ‘일지양검(一地兩檢)’ 사건과 올해 6월부터 인민해방군이 홍콩섬의 빅토리아항 일부를 군사 용도로 사용하기 시작한 것 역시 홍콩 시민들에게는 ‘중국 중앙정부가 일국양제를 무너뜨리고 홍콩을 잠식해 나가고 있다‘는 불안감을 안겨 주었다.
또한 이번 시위에서 경찰이 홍콩 전역의 병원 컴퓨터에 설치한 백도어 프로그램에 의해 시위 부상자들이 병원에서 연행되었다는 사실이 의사들에 의해 폭로되었으며, 이번 시위 이후 시위자 식별 및 체포를 위해 정부 청사 근처에 안면 인식이 가능한 중국제 고화질 CCTV가 설치됐다는 소식 역시 시민들을 분노케 하고 있다.
이처럼 현재 홍콩의 시민사회는 중국 중앙정부라는 거대한 체제를 상대로 홀로 ‘다윗과 골리앗’의 싸움을 벌이고 있다. 거대 권력에 저항하는 ‘역권운동’이 어떤 결말 을 맞게 될지는 예측하기 어려우나, 분명한 것은 많은 홍콩 시민들이 ‘배수진’을 치고 이 싸움에 임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번 시위는 어느 쪽의 승리로 끝나든 반환 이후 홍콩 사회에 가장 큰 파장을 일으킨 사건으로 기록될 것이며, 시위를 통해 드러난 내부의 갈등을 봉합하고 치유하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릴 것으로 보인다.
한국외대 국제지역대학원 석사 박세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