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으로부터 약 530여 년 전 한 중년의 나주(羅州) 선비가 왕명을 받아중국에 표류했던 경험을 붓으로 옮기기 시작했다. 친부상을 치르기 위해 급히 제주도에서 귀향하던 중 절강(浙江)에 표착했다가 막 돌아온 참이었다. 그는 추쇄경차관(推刷敬差官)으로 제주도에 부임한 사연부터 여섯 달만에 한양에 당도하기까지의 여정을 빼곡하게 세 권에 나누어 적었다. 최부(崔溥, 1454~1504)의 《금남표해록(錦南漂海錄)》은 그렇게 탄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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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부 │ 한국 │ 《금남표해록》 │ 1488 │ 28.5x24.2㎝ │ 국립해양박물관
최부는 산더미처럼 몰아치던 폭풍우, 처음 보는 고래와 신기한 해양생물들, 배고픔과 기갈보다 더한 두려움으로 점철된 생환 과정을 생생하게 기록하여 해양문학의 한 흐름을 일구었다. 또한 강남의 대표적 도시였던 항주, 소주를 거쳐 양자강을 건너고 북경과 한양에 도달하기까지 목도한 명(明)의 풍속, 산천, 제도, 운하와 문물 등을 손에 잡힐 듯 기록했다. 《금남표해록》이 엔닌(圓仁)의 《입당구법순례행기(入唐求法巡禮行記)》, 마르코 폴로의 《동방견문록》과 더불어 중국 3대 여행기로 손꼽히고 있는 것도 놀랄 일이 아니다. 수차의 이용과 제작법은 이후 충청도 해갈에 도움이 되어 아시아 과학사의 산 증거가 되었다. 성종의 명이 구체적으로 무엇이었는지는 전해지지 않는다. 그러나 《표해록》이 낯선 땅에서의 견문을 나누고자 했던 그의 열정의 소산이었음은 분명하다.
돌이켜보면 동아시아에서 표류기를 남긴 이가 최부만도 아니었고, 모두 임금의 명에 의한 것도 아니었다. 대부분 뜻밖에 접한 아시아의 풍경과 간난신고의 경험을 기록하려 한 아시아인의 자발적 의지에서 비롯되었다. 그리고 이들의 기록은 필사본으로, 목판 혹은 금속 인쇄본으로, 혹은 구전으로 전해져 아시아 각 국과 그 문화를 이해하는 하나의 길이 되어 주었다.
또한 표류기에는 국가 차원에 표류민을 송환하는 방법이나 제도가 구체화되기 이전, 풍랑에 시달리다 낯선 나라에 당도한 이방인들을 환대했던 동아시아의 역사가 담겨 있다. 일부 표류인들이 해적으로 오해받아 박해를 당하거나, 물건을 탐한 이들에 의해 무참히 살해되는 경우도 있었다. 그러나 작은 어촌이나 섬에 처음 도착한 외국인들을 발견한 이들은 고관대작이 아니었다. 하루하루 삶이 넉넉지 않은 동아시아의 어부나 촌로들이 기꺼이 목마른 자에게 물을 길어다 주고, 굶주린 자에게는 식량을 나누어 주었다. 비가 오면 하루 밤 쉴 곳을 마련해 준 것도 이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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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아의 표해록: 바다 건너 만난 이웃》 전시장 입구
전라남도 광주에 소재한 국립아시아문화전당 아시아문화연구소가 《아시아의 표해록: 바다 건너 만난 이웃》전을 개최한 첫 번째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우선 동아시아 표류기를 통해 서양과의 접촉이 본격화되기 전 실재했던 아시아 문화 교류의 한 양상을 복원할 수 있기 때문이다. 아시아의, 아시아를 위한, 아시아에 의한 기록 발굴은 정복의 역사적 경험을 바탕으로 한 서구 중심의 시각에서 탈피하려는 최근 문화연구의 흐름에도 부합한다.
또한 표류기는 국가, 저자, 혹은 기록 시기에 따라 상이한 특징을 보인다. 이를 비교한다면 자국의 역사와 타자의 시선을 종합하여 ‘함께 기억하는 인터아시아의 역사’를 구조화하는 시발점이 될 것이다. 결론적으로 아시아가 담은 아시아의 모습을 통하여 21세기 새로운 동아시아 시민 연대의 가능성을 탐색하고 발전시키고자 함이 본 출발점이자 주요 목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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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아의 표해록: 바다 건너 만난 이웃》 1부
다른 한편, 표해록이 가진 문화적·인류학적 가치에도 주목했다. 표해록은 뜻하지 않게 정처 없이 ‘표류(漂流)’했다가 돌아와 남긴 기록으로서, 박진감 넘치는 해양 체험과 이국의 풍속·제도 등을 기록한 역사기록이다. 연행록이나 조선통신사 등의 사행기록이나 실록이나 지방지 등은 일종의 공적 문서로서, 그 보고의 대상은 황제나 중앙정부였다. 따라서 표류인의 인적사항, 항해 목적과 일시, 표류 발생 경위, 심문 내용, 송환 과정, 혹은 해당 국가의 정보등을 담았는데, 한국의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 《비변사등록(備邊司謄錄)》, 중국의 외사처와 군기처 당안(檔案) 등이 여기에 속한다. 반면, 표해록이 속한 사적 기록은 저자의 신분이 다양하다. 승려, 군인, 관료, 무사, 무역상, 농민, 어부 등은 직접 혹은 지식인의 붓을 빌려 자신이 겪은 표해의 고난과 슬픔, 보고 들은 이국의 풍습과 견문에 대하여 자세히 적었다. 일종의 민간 교류와 연대의 생생한 증거가 되어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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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아의 표해록: 바다 건너 만난 이웃》 2부
《아시아의 표해록: 바다 건너 만난 이웃》전은 도입부를 포함 총 4부로 구성되어 있다. 도입부와 1부에서는 15세기부터 19세기까지 한국, 중국, 일본, 베트남의 대표적 표해록을 출간 연대순과 국가별로 정리하였다. 시기적으로 선박 제조술이 가장 발달하고 무역과 문화 교류가 빈번해진 19세기에, 지역적으로는 동북아시아에서 가장 많은 표해록이 전해진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최부의 《표해록》 역시 제주도에서 출발하였고, 그 외에도 스님의 포교 이야기, 멀리 류큐, 필리핀과 마카오까지 갔던 기록 역시 풍부하게 전해져 온다. 반면, 중국의 경우 전통적인 중화사상과 해금령 등으로 인하여 《해남잡저》등을 포함, 세 편 정도만 알려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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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정란 《해남잡저》 │ 중국 │ 1837 │ 13.1x22㎝ │ 남개대학교 도서관
한편, 섬나라 일본의 표해록은 그 수에 있어서 아시아에서 절대적 우위를 차지하고 있다. 지리적으로 가까운 조선과 중국 본토에 표착한 경우가 제일 많으나, 대만, 베트남, 필리핀, 인도네시아, 러시아, 태평양과 멀리 아메리카까지 간 경우도 있다. 특히 〈청국표류도〉나 《조선표류일기》에 수록된 아름다운 그림들은 민속지의 역할을 톡톡히 한다. 베트남의 경우 《일본견문록》과 같은 예외적인 경우를 제외하고 구전 설화나 짧은 역사 기록에만 표해 관련 기록이 남아 있다. 한편 1664년 제주도에표류하여 14년간 지냈던 경험을 적어 유럽에 조선을 처음 소개한 하멜의 《표류기》도 같이 소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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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스다 요시카타 《조선표류일기》 7책 │ 일본 │ 1824 │ 27×19cm │ 고베대학교 도서관
2부에서는 표해록을 분석하여 그 안에 담긴 아시아인의 다양한 문화 교류 양상을 소개하고자 하였다. 먼저 표류에 가장 영향을 미치는 해류와 계절풍에 대한 소개를 시작으로 각국의 주요 표착지 및 송환경로, 그리고 당시 아시아인의 세계관 및 지리 인식을 보여주는 〈천하도〉, 〈셀던의 중국 지도〉 등 주요 지도를 차례로 설명하였다. 표해는 계절풍이 부는 6~8월 혹은 10~12월 특정지역에 집중적으로 표착하였는데, 한국의 경우 중국 절강 지역에 다다르는 경우가 가장 많았다. 동아시아 표류인 송환체제는 송대(宋代)부터 서서히 제도화되기 시작하였으며 구휼(救恤)과 무상 송환의 원칙 하에 한, 중, 일 삼국의 긴밀한 공조로 이루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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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셀던경의 중국 지도〉 │ 중국 │ 17세기경 │ 100x160㎝ │ 옥스퍼드대학교 보드레이안 도서관
뒤이어 언어부터 의식주 그리고 종교와 사상을 통해 아시아가 바라본 아시아의 풍경을 관찰하였다. 표류기는 이국의 풍경과 생활상을 담고 있는 한편의 민속지이자 시민 연대의 증거이다. 외국에 나가는 일이 아주 드물었던 당시, 이웃 나라의 음식과 전통가옥, 말, 옷과 머리장식, 결혼식과 장례식은 물론 산세와 운하, 으리으리한 관가부터 저잣거리의 장사치까지 모두 호기심의 대상이었다. 표해록은 산더미 같은 파도와 고래에서부터 옷, 부채, 삿갓, 기방, 관청, 시민들의 일상까지 손에 잡힐 듯 글로, 혹은 그림으로 아시아를 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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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아의 표해록: 바다 건너 만난 이웃》 3부
마지막으로 3부 ‘콘텐츠로 만나는 표해’는 갑작스런 재난, 이방인과의 만남, 고향으로의 귀환까지 표해를 소재로 한 콘텐츠를 선보인다. 온갖 역경을 뚫고 귀환한 표해민들의 여정은 일종의 모험기 혹은 일대기적인 문학으로서 해양문학과 기행문학의 백미라 할 수 있습니다. 표류를 소재로 한 기록과 소설에 나타나는 다양한 인간의 감정을 희, 노, 애, 락 네 글자로 나누었다. 두려운 폭풍우, 끝을 알 수 없는 표류와 싸우며 구사일생했을 때의 기쁨, 재물을 빼앗는 해적들과 우물 안 개구리 같은 협소한 세계 인식에 대한 분노, 생사고락을 같이한 이들의 죽음으로 인한 슬픔, 그리고 귀향의 기쁨까지 출렁이는 감정의 굴곡은 우리 인생과 닮아 있다.이렇게 희노애락의 감정이 가득한 ‘표해’라는 소재는 문학과 영화, 만화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콘텐츠에서 쓰이고 있다. 가장 널리 알려진 무인도표류기라 할 수 있는 소설 《로빈슨 크루소》, 배구공 윌슨으로 유명한 영화 <캐스트 어웨이>, 조선에 표류한 영국인의 제주도 생활기를 담은 만화 《탐나는도다》 등을 소개하였다.
《아시아의 표해록: 바다 건너 만난 이웃》은 10월 27일까지 국립아시아문화전당 문화정보원 라이브러리파크 기획관 3에서 열린다. 이 전시를 통해 시민 연대가 거창한 국가 차원의 외교나 행사가 아니라 일상의 일부임을, 그리고 이미 오래전부터 우리 역사 속에서 실재 했던 경험이었음을 확인하시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