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평: 박홍서의 미중 카르텔 - 미중 갈등적 상호의존의 역사, 그리고 진화하는 국제정치 -

□ 선배가 생각하는 진화란 게 뭐예요?
□ 모두들 다른 존재가 되는 것, 그것이 진화야. 인간들은 다르다는 것에 불안을 느끼고 자기와 다른 인간을 배척하게 돼 있어. 하지만 야생에서는 달라야만 서로 존중을 받지. 거기에서는 다르다는 것이 살아남는 방법이야. 사는 곳도 다르고 먹어도 다르고 천적도 다르고, 서로 다른 존재들만이 평화롭게 공존하는 거야.
□ 왜 그렇게 지도를 열심히 보세요?
P 선배는 피식 웃었다.
□ 좌표 읽는 것은 내가 풀어본 중에 가장 쉬운 2차 방정식이야. 원점 O가 확실하면 P의 위치는 구할 수 있는 법이거든.
□ P의 위치가 구해지면 가야 할 방향이 보이겠죠?
□ 아니.
다음 순간 P 선배의 얼굴에서 웃음이 걷혔다. 내 등 너머 어딘가에 초점을 맞추고 있었다.
□ 올바른 길이란 건 없어. 인간은 그저 찾아다녀야 할 뿐이야.
출처: 은희경, 『아름다움이 나를 멸시한다』, 「지도중독」, 창비, 2007년, 181쪽.
현재
2021년 1월 20일(현지시각) 지난 4년간 국제정치를 풍미했던 트럼프가 불명예스럽게 퇴장하고, 조 바이든이 제46대 미국 대통령에 취임했다. 이 취임식이 전 세계를 뒤흔든 코로나19 팬데믹 상황에서 이뤄진 것 역시 인류의 집단기억에도 영향을 줄 것임은 분명하다. 베이징대 싱크탱크인 남중국해전략태세감지계획(SCSPI)가 공개한 자료에 따르면 미군의 시어도어 루스벨트 항공모함이 1월 23일 오전 10시 즈음 남중국해로 진입해 활동을 벌였다고 한다. 이어 24일과 25일에도 미군 용기와 고공정찰기 역시 남중국해로 들어가 활동을 벌였다. 중국 역시 1월 23일 중국 전투기 13기를 대만 서남쪽 방공식별구역(ADIZ)에 보내 응수했다. 바이든 대통령이 취임하면서 중국은 미국에 협력에 방점을 둔 수신호를 보냈지만 바이든 행정부는 임기 초반부터 강경한 모습을 상당 기간 이어나갈 것으로 보인다.
  • 사진 출처: 중국 财联社망(2021년 1월 21일 보도)
일반적으로 이런 모습을 기사로 엮은 보도를 인터넷 뉴스에서 우리가 보게 된다면 미중 간의 경쟁이 더 치열해지는 것은 아닌지. 언젠가는 세계사무를 좌지우지하는 이 두 강대국이 서로 극적인 충돌을 빚게 되는 것은 아닌지 우려의 시선을 보낼 수밖에 없다. 왜 우리는 우리나라와 다른 이 두 개의 강대국 간 관계에 지대한 관심이 있을까. 이에 대한 답은 누구나 쉽게 짐작할 수 있다. 이 두 강대국이 바로 현재를 움직이고 미래를 빚어낼 주역들이기 때문이다. 아울러 분단된 한반도의 현재와 미래에도 막강한 힘을 투사할 수 있는 행위자들이기 때문이기도 하다. 이는 많은 사람이 매일 오전 모바일 또는 TV 뉴스로 코로나19 확진환자와 사망자 현황을 확인하는 것과 우리 지역의 확진자 현황은 어떤지 점검하는 것과 유사하다. 따라서 현재와 미래에 많은 영향을 줄 수 있는 국가들에 대한 많은 관심은 자연스러운 일이 된다.
미국과 중국은 1950년 이 땅에서 한 차례 크게 충돌한 적이 있고 종전이 아닌 휴전상태의 주체들 가운데 일부이며 또 이 휴전이란 상태를 다시 변경시킬 수 있는 양자이기도 하다. 그래서 한반도에서 살아가는 (북한을 포함하여) 많은 이들은 이 두 강대국의 역학관계와 구조, 미래관계에 대해 대단한 흥미를 느끼고 있다.
과거와 미래
앞서 언급했듯 미·중 관계에 대해 우리가 많은 관심을 기울이는 것은 쉽게 말해 어떤 줄에 서야 할까에 대한 현실적인 고민 때문이다. 이 ‘미중 카르텔’의 저자 박홍서는 한국에서 흔히 제기되는 ‘한미 동맹 강화론’이나 ‘한중 관계 강화론’의 논리가 극단적이지만 않다면 어느 정도 설득력이 있다고 봤다. 하지만 저자는 ‘균형 발전론’이 가장 합리적인 선택이 될 것이라 강조한다. 그 이유로 우리나라의 최대 교역국인 중국을 소외시키는 것과 한반도 안보의 축인 동맹을 약화시켜 미국을 배제하는 것 모두 대안이 될 수 없다는 것을 들고 있다. 미국에 대해 한국의 몸값을 낮출 수도 있고 중국에 의해서는 우리가 함부로 다뤄질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래서 이 책의 저자는 한미와 한중 관계 균형 발전론의 방향성이 옳다고 결론 부분에서 밝히고 있다.
사진 출처: 네이버 책 박홍서, 미중 카르텔 –갈등적 상호 의존의 역사, 후마니타스, 2020년.
물론 이 책을 관통하는 주제는 각축전을 벌이는 미중 사이에서 우리가 균형을 이뤄야 한다는 것이 아니다. 저자는 우리가 흔히 미중 양국의 관계를 경쟁적 관계로 쉽게 치부해 버리거나 적대적 관계로 발전할 가능성이 농후하다는 인식을 가지고 있어서 이 같은 보편적인 관점에 상당한 문제를 제기하고 한반도에 사는 사람으로서의 시각으로 좀 더 비판적인 태도를 보일 것을 촉구한다. 그래서 미중 관계는 ‘국제질서의 안정을 대전제로 하는 상호 카르텔에 가깝다’라고 주장하는 것이 이 책의 핵심 요지이다. 현실주의 이론을 도구로 삼아 ‘결정적인 순간’에는 이익을 최대화하려는 것이 본질이라고 판단한다. 또한 외면상 보이는 두 나라의 경쟁은 미국에 의해서는 ‘중국위협론’으로 또 중국에는 ‘반미 민족주의’로 내부를 통합하기 위한 전략으로 활용되고 있다는 것 역시 구체적으로 밝히고 있다.
이 책의 1장부터 9장까지는 18세기와 19세기 미국과 중국이 만난 첫 대면의 순간부터 개혁개방 이후 현재에 이르기까지 역사적인 시간의 흐름에 따른 양자 간 관계에 대해 구체적으로 설명한다. 10장부터 15장까지는 두 국가 간 벌어지고 있는 주요한 최근 이슈들에 관해 기술했다. 그리고 16장은 미국과 중국의 미래에 대해 언급하고 17장은 한반도를 사는 우리는 어떤 선택과 고민을 해야 하는지 서술했다.
필자가 알고 있기로는 이 책은 저자가 박사과정 때부터 고민해 오던 적지 않은 문제의식을 바탕으로 15년이 넘는 부단한 연구 끝에 나온 중간 결과물이라 할 수 있다. 저자는 지금 ‘현실’에 주목한다. 그렇다고 ‘미래라는 이상’도 외면하지 않는다. 현실과 미래를 최대한 부여잡기 위한 학술적 노력이 이 책의 전반에 균형감 있게 펼쳐져 있다. 따라서 이 책의 제목과 부제만으로 쉽게 판단을 내리기보다는 일독을 권한다.
동일 전공이기 때문에 나는 저자의 글과 논문을 꽤 많이 본 축에 속한다. 그렇지만 이번 이 책을 읽으면서 들었던 질문 하나를 던지고자 한다. 책의 초반부에서 저자는 2018년 초반 한국에 번역출판되어 많은 인기를 끌었던 그레이엄 앨리슨의 ‘예정된 전쟁’의 논지를 비판하며 시작한다. 국제정치의 오래된 담론인 투키디데스 함정을 근거로 미·중 간 충돌은 불가피하다고 주장한 앨리슨의 논지는 오류가 있다고 봤다.
앨리슨은 지난 500년의 역사 속에서 16개의 패권국과 부상국 관계 중 12차례가 전쟁으로 귀결됐다는 역사적 사실을 끌어와 미·중 관계 역시 예외가 아닐 것이라 했다. 저자는 역사 속의 패권국과 떠오르는 부상국 사이의 전쟁 사례는 참고자료로만 삼아야 할 뿐이지 역사의 불확실성과 우연성을 강조하는 앨리슨은 사후적 설명의 오류를 범하고 있다고 언급한다. 그러나 이 책 역시 앨리슨과 유사하게 과거의 역사적 사례들을 끌어다 사용하고 있다. 16~17세기 임진왜란과 광해군의 균형 외교 및 병자호란, 19세기의 임오군란과 갑오경장, 20세기 6·25전쟁 등 한반도에서 벌어졌던 동아시아 패권국과 도전국 간의 역사적 사례를 주의 깊게 참고해야 할 것을 강조한다. 필자가 우둔해서 오독한 것인지는 몰라도 이런 장치들이 앨리슨의 그것과 어떤 차이가 있는지 궁금하다.
그런데도 미·중 관계를 경쟁적 관계 또는 적대적 관계로 여겨 신냉전이 펼쳐질 것이라는 주류 담론에 대해 중대한 문제를 제기했다는 것에 관해 이 책의 가치가 무엇보다 값지다. 두 국가가 일부러 이러한 것을 의도하거나 로드맵을 세밀하게 직조했다기보다는 카르텔(담합) 관계가 두 국가에게 현재로서는 그나마 합리적이고 이익을 극대화할 수 있는 구조를 만들어 낸다. ‘그들만의 리그’에서 상대적인 약소국에 속하는 우리가 할 수 있는 것들은 무엇인지 진지한 질문과 어려운 답을 최대한 쉽게 풀어나가려 한 저자의 노력을 좀 더 많은 독자가 알아줬으면 바란다. 최근 미·중 관계나 중국의 대외정책과 관련해 교재로 삼을만한 책이 마땅치 않았다. 이와 관련해 국내에서 제대로 쓴 책을 보기도 힘들거니와(국제정치학자들이 게으른 것인지 출판된 지 시간이 흘러 시의성이 없는 국내 외교 서적이 대부분임) 대체로 외국인이 쓴 책들을 번역해 읽다 보니 우리에게 맞지 않는 옷을 입는 느낌이었다. 덕분에 다음 학기 시의적절한 교재를 찾게 되었다.
진화하는 국제정치
도입 부분에서 필자는 은희경의 ‘아름다움이 나를 멸시한다’는 소설집의 일부를 인용했다. 국제정치학과 관련된 책의 서평에서 뜬금없이 왜 이러한 문장이 나오는지 궁금한 소수의 사람을 위해 약간의 부연 설명을 보탠다. 국제정치학은 20세기에 들어와 소개되었고 20세기 중후반 이후로 크게 발전한 학문이다. 크게 현실주의(경쟁), 자유주의(협력), 사회 구성주의(정체성), 마르크스주의 국제관계 이론이라는 네 가지 대담론으로 이뤄져 있다. 이 가운데 역시 주류는 현실주의와 자유주의이다. 인간의 이기심과 이타심을 사회적으로 또 국제적으로 확장한 결과물이다. 이 두 개의 대담론은 국제정치학계를 양분하며 패러다임을 지속해오고 있다. 국제정치학 연구자들은 대부분이 두 가지 담론에서 벗어난 태도를 보인다면 배척당하기 쉽다. 이는 정말 새로운 이론을 들고나오는 사람도 거의 없거니와 대부분 안전한 길을 선택하는 경향을 보이기 때문이다.
은희경의 소설집 안에서 한 주인공이 “모두 다른 존재가 되는 것, 그것이 진화야.”라고 말했던 것을 곱씹어 볼 필요가 있다. 작금의 국제관계는 ‘국가’와 ‘기업과 NGO 등 다양한 행위자’들을 기본 전제로 한다. 어느 한쪽에 방점을 찍어야만 한다. 같은 존재까지는 아니더라도 누군가와 유사한 존재가 되어야 살아남을 수 있다. ‘인간’은 그저 서로 다름을 찾아다닐 뿐이지만, 권력은 그렇지 못하다. 언제나 줄 세우기를 강요한다. ‘평화’는 다름의 다른 명칭이고, ‘전쟁’은 권력의 다른 명칭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20세기까지 ‘권력’은 늘 평범한 인류의 ‘다름’을 압도해왔다. 그네들에게 다르다는 것은 절대로 용납할 수 없는 일이다. 그래서 국제정치학은 어찌 보면 국가(권력)에 복종하고 순응하는 학문일지 모른다. 20세기 말 이뤄진 정보화로 촉발된 세계화는 여러 가지 장단점들이 혼재한다. 그렇지만 적어도 실시간으로 소통할 수 있는 이 시대에 권력을 상당 부분 감시하고 차단할 수 있다는 것은 순작용이라 판단된다. 권력을 감시하고 저항할 수 있는 장기평화의 ‘진화’가 빨리 도래하기를 희망한다.

창원대학교 중국학과 구성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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