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중 경쟁의 시대에 시민 중심의 동아시아 만들기
탈냉전 이후 미국은 동아시아 국가들이 미국을 배제하고 독자적인 동아시아 지역 공동체를 추구하는 것을 견제해왔다. 예컨대, 미국은 말레이시아의 마하티르 총리가 91년 주도했던 ‘동아시아 경제공동체’(East Asia Economic Caucus, EAEC)의 추진이라든가, 97년 일본이 주도했던 ‘아시아통화기금’(AMF), 중국 주도의 2005년 ‘동아시아 정상회의’(EAS) 등을 모두 반대한 바 있다. 이러한 동아시아 국가들의 독자적인 지역 공동체 시도로 미국의 세계 패권 체제를 위협할 신흥 세력이 동아시아에서 출현하고 나아가 동아시아 전체가 미국에 대항하는 지역주의 세력으로 확장되는 것을 우려하기 때문이다.
2000년대 이후 중국의 부상과 초강대국화가 뚜렷해지자 미국은 중국 중심의 동아시아 지역주의를 억제하는데 심혈을 기울였다. 대신 미국은 미국의 개입과 침투가 가능한 동아시아 지역 체제를 구축하는데 주력해왔다. 한편 미국은 동아시아 역내 동맹국들인 일본과 한국과의 관계를 강화하고 중-일 갈등과 한-중 갈등의 요인들을 활용하여 중국 중심의 동아시아 지역주의를 억제했다. 2012년 중일 사이의 영토분쟁, 2016년 사드배치로 인한 한중관계의 악화는 이러한 배경 하에서 나타났다.
중국은 동아시아 지역 내 리더십을 행사하려는 전략적 의도를 드러내왔다. 이를 위해 중국은 동아시아 지역주의 구축에서 역외국가 즉 미국의 개입을 반대하면서 자국 중심의 경제블록을 우선적으로 구축하여 미국의 영향력을 약화시키고 유리한 외부환경을 조성하고자 했다. 미국 주도의 동맹 체제에 대응하기 위해 중국은 러시아 등 다른 주변국과의 군사협력을 강화하는 한편, 한국, 일본 등 동아시아 지역 내 미국의 동맹국들에게 경제적 영향력을 확대해 왔고 이를 바탕으로 미국의 역내 동맹관계를 약화시키는데 주력했다.
미중 무역전쟁을 일으켰던 트럼프 정부가 끝나고 바이든 민주당 정부가 등장했지만 중국을 세계패권을 추구하는 가장 큰 적수로 보는 미국의 시각은 변함이 없다. 오히려 바이든 정부는 전통적 동맹관계를 복원하고 미국의 주도권을 회복하기 위해 동아시아의 쟁점에 적극 개입하고 중국에 대한 강경한 대응도 불사하겠다는 의지를 보이고 있다. 중국은 타협을 원하겠지만, 굴복하지는 않을 것이다. 이제 미-중간 체제 경쟁이 본격화되는 시기로 접어들었다. 미중경쟁 시대의 도래는 동아시아 지역공동체 추구가 더욱 어려워졌음을 의미할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동아시아 지역공동체 추구를 포기해야 할까?
동아시아 국가들이 동아시아 지역공동체를 추구하는 이유는 한 가지가 아니다. 동아시아 지역공동체가 경제적 번영을 가져다준다는 믿음 때문일 수도 있고 동아시아 지역 내 문화적 동질성에 대한 희구 때문일 수도 있다. 그러나 오늘날 동아시아 지역공동체가 추구되는 가장 중요한 이유는 무엇보다도 동아시아 역내 국가 사이의 전쟁과 충돌을 방지하는 평화의 제도가 될 수 있다는 점일 것이다. 십자군 전쟁에서 2차 세계대전까지 오랫동안 전쟁이 계속되었던 유럽에서 평화를 정착시킨 EU의 사례가 그 명확한 증거이다.
따라서 동아시아에서 지역공동체 추구는 선택의 문제가 아니라 목표가 되어야 한다. 다만, 평화의 제도로서 EU를 만들어낸 유럽과 달리, 동아시아의 형세는 좀 더 복잡하다. EU가 가능했던 것은 유럽의 주요 국가들이 세계 패권국 미국의 우방국들이 주도하고 미국과 보편적 가치를 공유하는 나라들이다. 이에 반해 동아시아는 한국, 일본 등 미국의 동맹국들이 주요 구성원이지만 동아시아는 여전히 미국과는 다른 가치와 문화를 가진 국가들이 많고, 특히 체제 면에서 상당히 이질적인 중국이 미국의 세계패권에 도전하는 상황이라 미중 경쟁과 대립구조는 고착화될 가능성이 높다.
그러므로 동아시아의 평화 구축을 위해서 한국 등 동아시아 각국은 새로운 지역공동체 전략을 모색해야 할 것이다. 즉, 그동안 일반화된 동아시아 지역공동체 모색과는 차별화된 새로운 틀과 접근이 필요하다고 생각된다.
우선, 시민사회 단위를 동아시아 협력의 주체로 새롭게 부각시켜야 한다. 국가 단위의 접근을 중단하자는 것이 아니라 국민국가 차원의 관계에서 오는 여러 가지 갈등들을 우회하여 시민사회 중심의 동아시아를 만들어보자. 이는 국가와 자본이 주도하는 동아시아가 아니라 인격적인 개인들의 자발적인 결합체로서 시민참여형 네트워크로 구성된 동아시아 지역공동체가 형성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동아시아의 도시(지역) 네트워크는 그 주민들의 생활공동체(living community) 역할을 수행할 수 있어야 한다. 즉 동아시아의 각 지역 주민들이 거주, 여행, 학습, 문화, 취업 등 다양한 생활상의 목적으로 서로의 지역으로 교류와 이동이 용이하고 장려되어 사실상의 하나의 공동체 역할을 수행할 수 있어야 한다. 나아가 동아시아 도시(지역) 시민공동체 사이에 일방적 이익 중심의 경제협력이 아닌 평화와 환경, 복지 수준을 높이기 위한 경제협력과 상호연대 구조를 만들어나가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동아시아 시민들 사이의 교류와 소통을 원활하게 할 수 있는 사회 인프라 구축을 위해 노력해야 한다. 코로나 19로 동아시아 역내의 시민 교류 활동이 완전히 중단된 상황이지만, 이러한 국면은 오히려 온라인 시민교류를 활성화시킬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될 수 있다. 온라인 시스템을 활용한 비대면 시민교류는 시공간을 초월하고 다룰 주제의 제한도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동아시아 시민교류를 기반으로 이제 각국의 시민사회가 나서서 동아시아의 시민 생활을 위협하는 다양한 쟁점들을 논의하고 공동의 대안을 모색하는 활동을 전개해야 한다. 예컨대 코비드 19의 확산에 대한 동아시아 시민사회의 공동의 협력 방안을 모색할 필요가 있다. 국가 차원의 방역협력도 필요하겠지만 동아시아 각국 시민사회가 동아시아 방역의 최소 규범과 기준을 마련하여 공유하고 이를 사회적으로 확산시킬 필요가 있다. 국가안보를 뛰어넘는 인간안보의 차원에서 동아시아 각국의 안보 문제를 토론하고 안보협력의 방향을 제시해야 한다. 생태적 지속가능성의 관점에서 동아시아 시민들의 삶을 위협하는 기후위기 문제를 논의하고 공동의 협력 방안을 마련해야 한다. 동아시아의 역사적 쟁점들에 대한 지속적인 토론을 통해 공동의 인식을 구축해나가면서 시민사회가 수용할 수 있는 역사적 화해의 기반을 구축해나가야 한다. 동아시아에서 형성된 국가주도적 자본주의의 문제점을 사회적으로 규율하는 역할을 동아시아 시민사회의 연대 하에서 이뤄지도록 한다.
얼마 전 일본 유학중에 철로에 떨어진 일본인을 구하려다 숨진 고 이수현씨의 20주년 추모식이 한국과 일본에서 열렸다. 20년이 지났지만 일본의 시민들은 그의 의로운 행동을 기억하며 많은 이들이 매년 성금을 보내고 있다. 2014년 역시 일본에서 선로에 떨어진 일본인을 구한 중국인 푸훙페이씨의 이야기가 전해졌는데 그는 이수현씨의 사례를 들어 “생명에 국적은 없다.”고 말하기도 했다. 2020년 한국에 이주노동자로 살던 카자흐스탄인 알리씨가 화재 현장에서 불길을 뚫고 10여명의 한국인을 구한 선행 사례도 있다. 우리가 시민사회의 연대 속에서 ‘사회적 아시아(Social Asia)’를 만들어나가야 할 숭고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동서대 동아시아학과, 중국연구센터장 이홍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