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청년국가와 중년국가, 그 사이 어딘가의 중국
중국 공산당의 나이가 100세가 되었다고 하는데, 20세기 초 근대 국민국가로의 전환 과정에서부터 시작해 지금까지의 성장 추세를 봤을 때 과연 현재 중국은 어떤 성장 단계에 도달해 있는 것일까? 물론 건국 초기 국가가 국민들의 아사(餓死)를 구제하지 못할 정도의 경제 수준에 머물렀던 단계로부터 이제는 1인당 GDP가 1만 불을 훌쩍 뛰어넘고, 더 나아가 장래 미국이라는 슈퍼 파워와 유일하게 맞설 수 있으리라는 기대를 한 몸에 받는, 어엿한 중견국이 되었다는 사실에서 사람으로 치자면 최소한 청년 단계를 넘어서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견해도 있다. 물론 국가의 수립과 성장, 그리고 발전 단계를 단순히 청년, 중년, 노년과 같은 세대 개념으로 이해하는 것 또한 지나친 단순화일 뿐만 아니라, 이 같은 세대론이라는 것이 근본적으로 특정한 코호트, 예를 들어 언어, 인종, 지역 혹은 세대 같은 동일 기준을 통해 그 영역 전체를 동질화 하는 인식적 한계를 내포하며 왜곡을 초래할 수 있어 그 같은 이해가 학문적 차원에서 유효한지에 대해 여전히 조심스러운 것이 사실이다.
- 100년 중국의 발전과 ‘청년’ 기호의 소환
이 같은 성장에도 불구하고 지난 100년 동안 중국이라는 국가의 정체성을 가장 선명하게 대변해 주는 하나의 단어가 있다면 ‘혁명’이었을 것이고, 이러한 혁명 과정에서 가장 두드러진 역할과 희생을 감내해 온 세대가 아마도 각 세대의 청년들이었다는 점은 부정하기 힘들다. 이 같은 청년 세대의 위상과 그 의미에 대해 아마도 두 가지 방향으로 해석이 가능할 것인데, 정면으로 보자면 중국이라는 국민국가의 건설 과정에서 청년의 세대가 그 중추로서 희생을 마다하지 않고 혁명과 발전의 동력을 제공해 왔다는 점, 그리고 반면에서는 국가 권력이 자신들에게 요구되는 국가적 의제를 실행하는데 있어서 이른바 ‘청년’이라는 기호를 반복적으로 그리고 다양한 각도와 의미로 소환했다는 점으로 동시에 읽힐 수 있다. 이 같이 국가가 ‘청년’이라는 기호를 소환해 온 역사는 지난 100년 간 중국 사회 발전의 다양한 분야와 경로 속에서 축적되어 왔고, 따라서 이에 대한 자각적 인식과 반성적 검토는 이후 새롭게 만들어질 정부와 청년들 사이의 동반적 관계에 든든한 토대를 제공할 것이다.
- 역사단절과 역사연속의 실천주체로서 ‘청년’
먼저 20세기를 열면서 미완의 근대국가체제였던 중화민국은 청(淸)이라는 봉건체제와의 역사적 단절을 시도했고, 이때 기존 중화질서의 종언을 선언하는 역사 단절의 주체로서 ‘청년’들을 역사의 장으로 소환한다. 중화체제와 역사에 대한 반역을 꿈꾸던 주체들은 이른바 ‘새 시대의 청년’, 즉 ‘신청년(新靑年)’으로 호명되어, 과학과 민주와 같은 근대적 가치에 대한 열망을 대변하는 집체로서 표상되었다. 취츄바이[瞿秋白]가 “야수의 젖을 먹고 자라난 봉건 종법사회의 패륜아이며, 신사계급의 역적인 동시에, 몇몇 로맨틱한 혁명가에게 바른 말을 마다하지 않았던 싸움 벗[諍友]”이라고 평가했던 루쉰[魯迅]의 형상을 응축해 보면, 바로 근대 프로젝트로서 새로운 청년 만들기는 1910년대부터 30년대에 이르기까지 그들에게 기탁되어 있던 각 시대의 구체적인 소명, 예를 들면 봉건적 정치체제의 타도, 군벌과 초기 자산계급에 저항하는 초보적 민중주의적 노선 형성, 그리고 서툴고 위선적인 급진주의 대한 견제와 반성이라는 중국 정치 발전사적 요구와 긴밀하게 결합되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어 1930년대와 40년대 제국주의의 대륙에 대한 본격적인 침략에 맞서서도, 또 국민당과의 투쟁 과정에서도 거대한 사회주의 중국의 탄생을 지지하는 시대적 실천 주체로서 청년은 지속적으로 소환되었다.
- 혁명의 기호만이 아닌 ‘청년’
그리고 이어지는 중화인민공화국의 성립 이후, 경제 체제의 사회주의적 전환 과정에서 이들 청년들이 상징하는 혁명의 순수성은 대내외적 상황을 초월하는 절대적 가치가 되어 정치 우선주의의 원리를 지지하고 동원 체제의 수립에 정당성을 부여하는 기제가 된다. 당시 신생국가로서 갖추었던 전면적인 국가 동원 체제는 경제적 난맥상이나 자본과의 타협적 수정주의에 대해 체제가 가지고 있는 윤리적 우월성, 그리고 청년들의 혁명적 에너지를 방패삼아 자신의 합법성 원리를 구축하고 있었다. 그리고 이 같은 혁명의 순수성에 대한 집착은 결과적으로 문화대혁명의 정치적 극단주의에서처럼 통제될 수 없는 청년 에너지와 결합하여 국가 시스템이 일시적으로 균형을 상실할 정도의 이념 과잉을 초래했다. 이 과정을 되돌아 볼 때 주의할 점은 당시 단순히 정치적으로 소모된 어린 홍위병들의 이미지에만 주목할 것이 아니라, 훗날 상처를 보듬고 개인의 아픔을 사회적 성숙으로 이끌어 낸 ‘지청(知靑)’들의 반성까지도 중국 청년사의 맥락 위에 같이 올려놓고 보아야 한다는 점이다. 청년이라는 기호의 실제성과 관련해서, 89년 천안문 사건 당시 개혁개방을 주도했던 공산당의 지도부가 광장의 청년들에게 무력 진압을 단호하게 실행한 배경에는 문화대혁명 시기에 경험한 청년들의 에너지에 대한 트라우마에서 비롯되었다는 점을 상기해 볼 때, 당시 당 지도부는 청년을 하나의 정치적 열망으로만 단순화하여 해석했다. 그러나 그때와는 달리 지금의 청년들은 단순한 집단 정체성으로도, 또 어떤 단일한 정치적, 문화적 욕망으로도 해석이 불가능한, 다면적 존재들이다. 최소한 지금의 청년들을 구체적으로 만나기 위해서는 그들과 연계된 의제의 구체성이 반드시 수반되어야 하는 것이다.
- 중국 공간 구조의 모순과 ‘청년’
1980년대 이후 중공중앙이 진행한 개혁개방의 추진은 중국의 시장을 세계 자본에게 개방했다는 의미에서 주로 주목을 받아 왔지만, 사실 중국 사회의 내부적 관점에서 볼 때 이 시기부터 도농이원구조(都農二元構造), 즉 도시와 농촌 사이에 존재하는 경계들이 동요하기 시작했고, 또 그 경계 위를 가로지르는 청년 노동자들이 등장하여 중국 사회 내부의 경제 체제는 물론 문화·사회 구조의 저변에서 변화를 불러왔다. 물론 정부의 묵인 혹은 정책의 독려 속에서 이들이 농촌에 대한 도시의 내부 식민화 수단으로 이용된 측면이 강했지만, 그래도 청년들은 자신의 가족과 국가를 위해 기꺼이 젊음을 제공했다. 이들은 지난 40년 간 중국 경제의 초고속 성장을 값싼 임금으로 뒷받침하면서도, 사회적 대우에서는 거주, 교육, 사회보장 등의 여러 방면에서 온갖 불평등을 감내하며 자신들의 가정을 위해 희생해 왔다. 국가는 이들을 경제발전의 수단으로 충실하게 활용한 반면 법적 테두리의 바깥에 방치함으로써, 국가 내부의 본원적인 공간 모순이 당장 현실에서 드러나는 상황을 회피하고, 이 같은 문제에 대한 해결을 후대로 미루는 지연 전략을 사용했다.
- 도시 사이를 유동하는 ‘고된’ 청년들, 그리고 ‘중산’청년과 ‘애국’청년의 시대
2010년 이후 청년과 관련한 변화의 흐름은 더욱 다양해졌고, 근대 혁명 이후 국가의 정치·경제 체계, 혹은 도농의 공간 구조 틀 속에서 반복적으로 소환되어 오던 청년들과는 본질적으로 다른 청년들이 등장한다. 이들은 이전 홍위병처럼 이념을 추구하거나 아니면 1세대의 농민공(農民工), 즉 초기 이주 노동자들처럼 생산관계에만 완전히 종속되어 있는 이들도 아니다. 이들은 이전 청년들과는 달리 자신들의 문화적 지향과 욕구를 솔직히 드러내고, 도시 위를 떠돌면서 개인의 조건에 맞는 생활환경을 찾아 끊임없이 유동하는 속성을 갖는다. 이전 세대와 비교해 ‘신세대농민공[新生代農民工]’, ‘개미족[螞蟻族]’, 혹은 지역을 근거로 해서 ‘베이피아오(北漂)’나 ‘후피아오(滬漂)’ 등 그들을 바라보는 관점에 따라 다르게 호명되기는 하지만, 앞 세대보다 훨씬 더 복잡하고 다양한 삶의 스펙트럼을 갖는다. 그래서 어떤 하나의 정체성으로 규정하기도 힘든, ‘고된’ 청년 집단이다. 이들은 단순한 노동력으로서의 이주 노동자가 아니라 비록 도시의 후커우[戶口]는 없을지라도 도시 안에서 적당한 일자리와 문화적 취향을 찾아 소비하면서, 그들 스스로의 내면에 다양한 정동(情動)을 만들어 가고 있다. 최근에는 여기서 더 나아가 중국 사회의 자본축적이 더욱 고도화됨에 도시 중산층의 비율도 현저히 증가하면서, 이들의 자제들이 해외로의 유학을 가거나 창업 등을 통해 젊은 시절에 경제적 독립을 얻는 등 대안적 생애 기획을 구체화하며 기존 중국 청년들의 인생 경로와는 차별되는, 이른바 ‘중산(中産)’ 청년의 길을 가는 젊은이들도 갈수록 증가하고 있다. 그리고 또 한편에서는 인터넷을 중심으로 애국주의의 영향을 받은 지우링허우(90后) 세대들이 이른바 ‘팬덤식(반권식,飯圈式) 애국1)주의’를 강화하는 현상을 목격하거나, 혹은 ‘샤오펀훙(小粉紅)2)’과 같은 사이트에서 성별, 계급, 민족 등을 둘러싼 배제와 혐오의 구분 짓기, 그리고 그 정동(情動)을 발견하게 되는데, 이 또한 국가와 청년과의 현재적 관계를 분석하고 통찰하는데 있어 빠뜨릴 수 없는 핵심 현장이라 할 수 있다.
- ‘청년’이라는 기호, 소모의 대상을 넘어 미래기획의 주체로
지난 100년을 뒤돌아 볼 때 중국이라는 근대국가는 지속적으로, 그리고 적극적으로 ‘청년’이라는 기호를 자신의 의제 영역 안으로 소환해 왔다. 때로는 이들을 혁명의 맨 앞줄에 세우기도 하고, 때로는 국가와 가족 단위의 경제 성장이라는 공동의 대의를 내세워 열악한 노동 환경을 감내하도록 하였다. 국가의 입장에서 볼 때 ‘청년’이라는 기호는 이념을 확산할 필요가 있을 때, 전면적인 생산력의 증대가 필요할 때, 그리고 내부의 모순을 은폐하고 체제의 공고성을 강화하고 싶을 때 너무 유용한 매개가 되어 주었다. 그러면서 중국이라는 국가도 많은 시행착오를 수정하면서 자신의 청년기를 넘어 온 것인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과연 중국의 미래를 어디에 기탁할지를 생각해 볼 때, 국가의 차원에서 이 같이 ‘청년’이라는 기호를 단순히 소모의 대상으로 보는 관점을 어떻게 극복할지에 대해서는 지금부터 논의가 시작되어야 하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