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해혁명으로 1912년 탄생한 중화민국은 아시아 최초의 대의제 민주공화국이었다. 중화민국은 헌법에 의해 권력의 구성이 규정되었다. 총통의 권력을 제한하기 위해 내각제를 채택하였으며 정당정치에 기반해 전국적 선거로 구성된 의회가 국가권력의 중추가 되도록 설계되었다. 그러나 1년 만에 중화민국의 정당정치와 의회제는 총통이었던 위안스카이에게 유린당했고 정국은 결국 군벌들이 각축을 벌이는 정치적 혼란으로 귀결된다. ‘민주와 과학’을 모토로 한 신문화운동이 벌어졌지만 이제 중국에는 서구 자유주의에 입각한 서구식 민주정치보다 1917년에 갓 태어난 소련식 사회주의 정치체제를 새로운 국가모델로 지향하는 혁명 세력이 등장했다. 1921년 중국공산당의 탄생이다.
그러나 세력이 미약했던 중국공산당은 자산계급의 황색지식인 및 유사한 기타 당파와의 어떤 연계도 철저히 단절하겠다던 창당 당시의 무산계급독재 강령과는 달리 자산계급을 대표하는 국민당과의 협력 노선을 선택한다. 이는 반제국주의 반봉건 노선에 입각한 것으로 자유민주주의 원리에 입각한 국민당의 민주공화국 건설에 중국공산당이 참여할 것임을 의미했다. 비록 국민당과의 협력 노선이 결렬되어 공산당이 다시 수세로 몰렸을 때 중국공산당은 무산계급독재라는 강령을 구현하는 소비에트체제를 구축하기도 했지만, 국민당과의 협력이 다시 성사되는 즈음에는 자유민주주의 체제를 인정하되 공산당의 참정을 요구하였다.
정작 국공합작이 진행되자 중국공산당은 ‘신민주주의’ 체제의 수립을 주장했는데 이는 자유민주주의도 아니고 소련식의 사회주의 정치체제도 아닌 좌우합작의 정치체제를 의미했다. 즉 중국 공산당은 국민당과 대등한 위치에서 연립정부를 구성하고자 했다. 이러한 다당 연립정부 체제안은 중국 국내 여론의 지지는 물론 미국 정부의 지지도 얻었던 방안이었다. 실제 1946년 초 국민당과의 합의를 통해 통일 정부 수립 등을 눈앞에 두기도 했다.
비록 국민당과의 합의는 결렬되어 국공내전이 발발했지만 중국공산당이 신민주주의 연립정부 체제를 구축하겠다는 약속을 저버린 것은 아니었다. 1949년 중화인민공화국이 수립되자 국민당을 제외한 다른 민족주의 세력들과 연합정부를 구성하였다. 중국공산당 뿐 아니라 다른 민족주의 세력의 정치지도자들이 중화인민공화국 정부의 주요 직무를 나눠 맡았다. 예컨대 쑨원(孫文)의 부인 쑹칭링(宋慶齡)이 중화인민공화국 부주석이 되는 등 6명의 부주석 가운데 3명이 비공산당 세력에게 할애되었고 24개 부처의 장관(部長) 가운데 11개 부처의 장관을 비공산당 세력이 맡았다. 신민주주의 연합정권 체제는 중국 인민들의 광범위한 지지를 받았다. 중국공산당의 신민주주의 연합정부 체제가 갖는 민족주의적 호소력이 크게 작용했기 때문이다. 시민사회에 열성적인 공산당 지지자가 다수 있었음은 물론이고 사회학자 페이샤오퉁(費孝通), 철학자 펑여우란(馮友蘭), 경제학자 마인추(馬寅初)를 비롯한 당대의 주요 지식인들이 연합정부라는 이러한 새로운 국가건설 목표에 동의하여 공산당 정권에 적극 협력하였다.
하지만, 연합정부 체제에 대한 공감대는 얼마 못가서 조금씩 허물어지기 시작했다. 중국공산당은 50년대 초부터 지식인이나 여타 정치세력에 대한 정치적 압박을 강화하면서 연합정부의 취지가 점점 무색해지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대표적인 것인 1952년 이후 진행된 사상개조(思想改造) 운동이다. 사상개조운동은 유교적 전통가치나 서구의 자유주의 사상을 가진 지식인들 그리고 학생들을 대상으로 마르크스주의와 마오쩌둥 사상을 강제로 주입시켰던 것으로 연합정부 하에서 당연시될 것으로 믿어졌던 사상의 자유, 표현의 자유가 더 이상 보장될 수 없음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결국, 사상개조운동을 통해 중국공산당의 이념적 독재 체제가 기본적으로 구현되는 것이다. 1953년 사회주의화를 공식 선언하고 1954년 전국인민대표대회의 설립 그리고 중화인민공화국 헌법의 공포는 이제 중국은 민주집중제 원리에 입각한 의행합일의 소비에트평의회 체제라는 사회주의 정치체제의 기본 틀을 완성했음을 의미했다.
1956년-57년 발생했던 ‘백화제방 백가쟁명(百花齐放、百家争鸣)’의 쌍백(双百)운동은 중국공산당의 정풍운동 차원으로 시작되었지만 공산당의 권력 집중과 독재 체제에 대한 非공산당 민족주의 정치세력과 민주적 사회주의자들의 신랄한 비판과 저항 운동으로 나타났다. 그러나 소련에서 독재자 스탈린에 대한 격하 운동이 벌어지고 동유럽에서는 반(反)소련 반(反)사회주의 대중운동이 일어나는 등 공산당 독재체제에 대한 저항이 일어나는 등 국제사회주의 체제의 위기가 심화되자 중국공산당은 非공산당 민족주의 정치세력과 민주적 사회주의자들에 대한 정치적 반격 운동인 반우파 투쟁을 단행한다. 5.7체제라고 불리는 중국공산당의 당독재 체제는 이렇게 확립된다.
공산당의 당독재 체제가 1957년을 기점으로 확립되었지만 중국 공산당 당내 노선투쟁은 여전히 존재했다. 즉 중국 공산당 당내에는 노선을 달리하는 여러 세력이 공존함으로써 상호견제와 균형이 당내에 존재했다고 볼 수 있다. 예컨대, 1958년 대약진 운동을 주도했던 마오쩌둥은 1962년 대약진 운동 실패가 드러나 류사오치 등의 비판을 받자 그 책임을 지고 국가주석을 사임했고 실권을 류사오치와 덩샤오핑에게 넘겼다. 류사오치와 덩샤오핑은 경제회복을 위해 시장을 허용했던 실용주의 개혁파였다. 그러나 이러한 실용주의 노선은 다시 계급투쟁을 중시했던 마오쩌둥과 당내 급진 좌파의 반격을 가져오니 이것이 1966년 문화대혁명이다.
문화대혁명은 이미 중국 사회에서 기득권화되었던 공산당 독재 체제에 대한 대중의 공격이 독려되고 파리코뮌을 모델로 하는 자치 체제를 구상되었다는 점에서 혁명적 코뮌체제의 성격도 존재했다. 실제 문화대혁명의 강령 <16조> 가운데에는 제9조 조항을 보면 중국의 대중들이 파리코뮌처럼 문화혁명 소조, 혁명위원회 간부들과 문화혁명대표대회 대표들을 전면적인 선거제를 통해 직접 선출할 것을 명시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혁명적 코뮌체제 구상은 곧 부정되었으며 인민해방군의 진압으로 공산당 체제는 다시 복원되었다. 달라진 점이 있다면 이제 중국공산당은 당독재인 동시에 공산당 자체가 마오쩌둥 1인으로의 권력집중이 이루어진 가부장적 독재체제로 변모한 것이다.
문화대혁명이 지속되면서 공산당의 독재, 마오쩌둥과 그 추종세력의 독재에 대한 겹겹이 쌓였던 대중적 불만이 1976년 초 저우언라이 총리의 죽음을 계기로 폭발하니 이것이 1976년 4.5 운동 즉 제1차 천안문 운동이다. 1976년 9월 마오쩌둥의 죽음이후 그 추종세력이었던 4인방도 체포되지만 민주적 사회주의를 요구하는 대중운동은 계속되어 1978-1979년의 ‘민주의 벽’ 운동 등으로 지속적으로 나타났다. 이러한 민주화 분위기에 편승하여 권력을 잡은 개혁파 지도부는 사회주의서의 민주주의 구현을 위한 정치개혁을 핵심 국정과제로 삼았고 점진적이지만 중국 공산당의 일당 지배체제 하에서 다양한 형태의 정치개혁을 추진하였다. 중국 공산당의 집단지도체제가 확립되었으며 종신제가 폐지되었고 당정분리가 추진되었다. 권력하방이 추진되어 지방정부의 자율권이 확대되었고 정부와 기업의 분리가 실행되었다. 다양한 사상이 유입되었고 표현의 자유도 제한적이나마 이루어졌다. 당시 후야오방 공산당 총서기는 이러한 수준에 만족하지 않고 보다 혁신적인 정치개혁안도 모색하고 있었다.
그러나 노선투쟁에서 실패한 후야오방 총서기의 갑작스런 죽음을 계기로 대중들이 천안문 광장에 집결하여 급속한 민주화를 요구하자 덩샤오핑 등 중국공산당의 원로들은 이를 중국공산당의 일당 지배 체제에 대한 도전으로 인식했다. 제2차 천안문 운동에 대한 무력진압으로 중국공산당은 일당 독재체제를 다시 강화할 수 있었다. 6.4 천안문 운동을 진압한 이후 중국공산당은 비록 중국인민정치협상회의 재활성화, 전국인민대표대회 개선 등의 조치를 취했지만 1990년대는 정치개혁이 크게 억제되었다.
중국이 정치개혁을 다시 가속화한 것은 1990년대 후반으로 중국이 시장화 개혁을 더욱 가속화하는 것에 멈추지 않고 세계경제와의 통합을 모색하던 즈음이었다. 기층선거가 활성화되고 권력 승계와 당내 민주주의를 위한 여러 관례적 규정들이 만들어졌다. 사상의 다원화가 허용되었고 표현의 자유, 언론의 자유도 점진적이나마 신장되었다. 2000년대 후진타오 집권 이후에는 민주주의란 좋은 것이라는 공감대가 확고해졌으며 중국 정부는 처음으로 중국식 민주 주의의 이념과 정치개혁 비전을 대외적으로 밝히기도 했다. 그러나 이 역시 공산당의 일당 지배체제를 전제로 하는 것이었기에 한계 역시 분명했지만, 그래도 중국의 정치개혁 가능성에 대한 기대는 여전히 남아있었다.
그러나 2012년 이후 등장한 시진핑 시대은 1990년대 후반 이후 2000년대 계속되어 온 중국공산당의 정치개혁 모색이 다시 중단되고 오히려 정치개혁 이전의 권력집중 시기로 역행하는 흐름으로 가고 있다. 홍색귀족이라 할 시진핑이 집권한 이후 오히려 최고지도자 1인으로 권력집중이 심화되고 있어 마치 1인 권력독점을 누린 마오쩌둥의 시대로 돌아가는 듯 하다. 마오쩌둥의 가부장적 1인 독재를 사실상 비판했던 덩샤오핑 시대의 정치개혁 성과들조차도 무력화되고 있다. 중국공산당이 창당한지 올해 100주년이라고는 하지만 중국정치의 현실은 이리저리 100 걸음이나 걸어보았지만 결국은 제자리로 돌아온 듯한 황당한 모습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