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동아시아 시민성은 과거사의 반성적 성찰로부터 시작
전근대 동아시아 세계질서는 획일화할 수 없지만, 중국을 중심에 둔 개별 국가의 자립을 전제로 한 ‘조공과 회사’라는 독특한 시스템으로 구성되었다. 물론 이들 국가 간의 갈등과 분쟁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대체로 이와 같은 시스템이 유지된 것도 사실이다. 그런데 전근대의 동아시아 세계질서를 둘러싸고 현재에도 다양한 해석이 가능하며, 근대 역사학의 발전에 따라 이를 근대 국민국가의 중요한 토대로 이용하는 측면도 강하다. 하지만 분명 동아시아를 둘러싸고 ‘조공시스템론’이든 ‘제국시스템론’이든 ‘천하체제론’이든 전근대 국가 간의 관계와 ‘제국주의와 식민주의’ 그리고 ‘냉전’에 기초를 둔 근대 국가 간의 관계는 달랐다고 할 수 있다.
근대 국민국가를 구축하고 자국의 이해를 확대하기 위해 서구는 아프리카, 아메리카를 거쳐 아시아로 침탈했다. 서구 제국주의의 동아시아 침략과 그 침략의 위기를 이웃 동아시아 국가들을 침탈하여 식민지화함으로써 벗어나고자 했던 일본 제국주의로 말미암아 동아시아는 새로운 서구적 근대체제로 접어들었다. 일본은 안으로 오키나와와 사할린을 경략하여 식민지로 만들었다. 밖으로는 대만과 조선 그리고 중국의 동북지역을 침략하여 관동주와 만주국이라는 식민지화했다. 한편, 중국까지 그들의 식민지로 만들고자 폭력적인 통치와 침략을 자행했다. 이와 같은 과정은 전쟁과 폭력의 연속적인 과정을 통해 전개되었으며 수많은 피식민지, 반식민지 민중들의 피해와 희생을 담보로 했다.
일본의 제국주의적 침략이 중국으로까지 확대되자, 동아시아 이권에 처음부터 관심이 많았던 서구 제국주의는 일본의 중국 진출에 제동을 걸기 시작했다. 특히 중국에 많은 자본을 투자하고 있던 미국과 한 차례 러일전쟁으로 분쟁의 경험이 있던 러시아는 적극적으로 나섰다. 일본은 곧바로 동양과 서양의 대결이라는 명분을 내세우며 2차 세계대전에 뛰어들었다. 2차 세계대전은 이른바 연합국의 승리로 귀결되어 일본의 식민지였던 동아시아 국가는 해방되었다.
하지만 식민지 국가의 독립국가 건설과 관련해 자국의 이해를 담보할 수 있는 국가의 수립을 욕망하던 미국과 소련의 냉전체제라는 또 다른 체제 경쟁으로 말미암아 동아시아 국가는 내전과 국제전의 소용돌이에 빠져들어 갔다. 이로 말미암아 동아시아 지역의 민중들은 고스란히 전쟁에 무방비 상태로 노출되어 희생되었다. 나아가 냉전체제와 국가 권력의 유지라는 측면에서 여전히 같은 민족 또는 이웃 나라와 갈등, 불화, 분쟁의 지속은 민중들의 피해와 희생을 지속시켰다. 이른바 실제 갈등의 경험을 넘어 잠재적 갈등의 피해를 고스란히 동아시아 민중이 경험하고 있는 것이다.
과거의 경험을 넘어 현재에도 이어지고 있는 동아시아 민중의 피해와 희생은 일국적인 근대 국가체제와 이를 이분화하는 냉전체제(신냉전)의 유지 때문이다. 따라서 동아시아를 둘러싸고 평화와 연대는 요원하며 반목, 갈등, 불화, 분쟁의 씨앗은 그대로 남아 있다. 이와 같은 상황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이른바 일국사적인 측면에서 국가 권력에 이용당하는 것이 아니라 동아시아를 넘어 세계사적인 관점에서 역사를 반성적으로 성찰할 필요가 있다. 이른바 국가 권력의 폭력을 문제 삼고 또 동아시아 민중 간의 연대의 경험을 복원하며 극복할 필요가 있다. 이를 위해서 우선적으로 과거 역사의 반성적 성찰이 필요하다.
2. 역사적 성찰을 위한 노력 – 동아시아 대학생 평화인권캠프
동아시아를 둘러싼 과거 역사의 반성적 성찰과 이를 토대로 한 새로운 시민성을 구축하기 위한 노력은 현재도 다양한 방향에서 진행되고 있다. 여기서는 그 일환으로 전개되고 있는 한 사례를 통해 동아시아 시민성 구축의 과정을 소개하고자 한다. 그 사례는 현재 한국과 일본의 대학생들을 중심으로 활동하고 있는 ‘동아시아 대학생 평화인권캠프’(이하 동평)이다.
동평은 일본의 리츠메이칸대학교, 한국의 서울대학교, 전남대학교, 제주대학교를 중심으로 2000년 대한민국과 2001년 오키나와 및 대만에서의 준비 단계를 거쳐 2002년 8월 제주 캠프로 시작되었다. 현재 2020년 2월, 제36회 동평으로 대마도 캠프를 준비하던 중 코로나 사태로 중단되었지만 20년간 35회에 걸쳐 지속되었다. 그 사이 일본의 APU대학교와 한국의 동아대학교가 캠프 구성원에 포함되었으며, 서울과 전남의 경우 한 대학을 넘어 지역 대학을 포함하는 형태로 확대되었다. 나아가 중국 등 중화권 대학으로도 그 영역을 확장하기 위한 노력을 전개하여 중일 간 역사 논쟁이 불거져 불발로 끝났지만, 연변대학교에서 중국 캠프를 진행하고자 했다. 또한, 대만의 타이난 대학교도 옵저버로 참여하기도 했다. 향후에도 동아시아 지역으로 확대하고자 노력하고 있다.
동평의 목적은 동아시아에서 제국주의, 냉전, 국가폭력의 역사와 이에 대한 민중의 저항을 각 지역의 현장에서 직접 발로 확인하고 서로 토론하고 소통하는 것이다. 즉, 동아시아 대학생들이 동아시아 각 지역을 돌아가며 캠프를 열고 이를 통해 다른 지역, 다른 시간 속에서 일어난 각 지역의 역사적 사건들을 공부하고 체험함으로써, 이 사건들이 따로 떨어진 개별적인 것이 아니라 동아시아라는 거대한 공동체 속에서 일관된 힘과 권력의 작동 방식에 의해서 발생했다는 것을 깨닫는 것이다. 따라서 동아시아 각 지역의 경험이 개별 지역의 경험과 무관한 것이 아니라 유사한 역사적 맥락 속에서 이루어지고 있었다는 인식 속에서 상호 연대의 필요성을 확인하는 것이다.
20년간 35회 걸친 캠프는 대체로 한국과 일본을 교차하며 진행되었다. 지금까지 각 지역 캠프를 관통하는 것은 앞에서도 언급한 동아시아 근현대의 제국주의, 냉전, 국가폭력이었다. 제국주의와 관련된 구체적인 사례를 들면, 2017년 제30회 동평은 일본 나가사키에서 ‘전쟁과 근대화에 의한 인권침해’라는 주제로 열렸다. 나가사키는 주지하다시피 일본 제국주의와 긴밀한 관계가 있던 지역이었다. 현재 ‘메이지 일본의 산업혁명유산’이라는 이름으로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록되어 있지만, 이는 제국주의와 식민지 침탈에 기반을 둔 산업시설이었다. 또한 일본 제국주의의 확장 과정에 벌어진 2차 세계대전으로 말미암아 원폭이 투여되어 피해가 발생한 대표적인 지역이었다. 동평은 이 지역을 동아시아 대학생들과 함께 답사하며 제국주의하에 진행된 일본의 자본주의적 발전과 근대적 산업이 식민지로부터 동원된 강제노동에 기반을 두고 있음을 확인하고 강제노동에 동원된 사람들, 나아가 원폭의 피해를 입어 죽음에 이른 사람들을 어떻게 기억하고 배워나가야 하는지, 나아가 이와 같은 전쟁과 관련된 산업으로 인하여 목숨을 잃은 수많은 사람들을 잊지 않기 위해서 대학생들은 어떻게 해야하는지 등의 질문을 가지고 현장을 발로 확인하고 다시 캠프를 통해 고민하고 토론하고 생각을 공유했다.
동아시아 냉전과 관련해서 2017년 제31회 동평은 서울과 DMZ에서 ‘냉전 속 열전: 한반도 분단과 동아시아 냉전 – DMZ를 따라서’라는 주제로 열렸다. 구체적으로 먼저, 한반도 분단 속 국가폭력과 경계인들이라는 소주제 아래 강의, 답사, 토론을 통해 한국전쟁에서 벌어진 학살, 살인, 강간 등의 행위와 국가주의 및 민족주의에 외면당한 다양한 정체성의 피해자들을 다시 돌아보고 평화를 위한 국가와 공동체의 역할을 고민했다. 둘째, 한반도 분단과 동아시아 냉전의 기록이 남아 있는 필드워크 장소들을 토대로 전쟁의 참혹함과 더불어 우리가 진정으로 꿈꾸는 평화는 어떤 모습인지 논의했다. 셋째, 동아시아의 신냉전과 분단 극복을 위해 어떤 방식으로 해소할 수 있는지 고민해 보면서 앞으로의 동아시아 냉전 극복, 한반도 분단 극복의 가능성을 찾아보는 시간을 가졌다.
3. 동아시아 대학생 평화인권캠프의 지속과 향후 과제
동평은 이상과 같이 동아시아 지역의 역사를 토대로 이를 반성적으로 성찰하고 미래에 함께 연대할 수 있는 시민성을 기르는 장으로 그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 코로나 사태로 잠시 중단되긴 했지만 앞으로도 한국과 일본의 7개 대학교 학생들이 주축이 되어 여름과 겨울방학을 중심으로 각 지역의 제국주의, 냉전, 국가폭력의 장소들을 함께 공부하고 답사하며 토론하고 소통할 것이다. 다만 그 지속을 위해서 더욱더 동평의 공고화는 물론이고 발전적으로 확대할 필요가 있다.
이미 내부적으로 소통의 문제 등 진행 과정의 어려움 때문에 치열한 논의 과정에 있긴 하지만, 최소한 중화권 국가의 대학생까지 포함하는 동평이 될 수 있어야 한다. 과거 연변대학교를 통한 중국 캠프의 계획, 대만 타이난 대학교의 옵저버 참여가 진행된 적이 있기 때문에 차근차근 이에 대한 준비를 토대로 확대할 필요가 있다. 더군다나 최근 중국 청년층의 역사 인식과 관련한 한국의 반중 정서 고양 등을 고려할 때, 최소한 동아시아 3국의 대학생들이 함께 역사에 대한 제대로 된 반성적 성찰을 토대로 서로 이해하며 협력하는 연대의 장이 진행될 필요가 있다. 그렇지 않으면 계속해서 심화되는 각 지역의 국가주의와 민족주의 아래 평화와 연대가 아닌 갈등과 불화의 상태를 유지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또한 그간 평캠 주제들이 대체적으로 가해와 피해의 역사, 즉 기억하지 않고 망각에 빠진 타자의 피해와 희생에 집중되었다. 물론 향후에도 이와 같은 주제에 집중할 필요가 있다. 다만 또 다른 측면에서 과거의 긍정적인 역사도 살펴볼 필요가 있다. 제국-식민지 체제와 냉전체제 등으로 한계는 있었지만 그 과정에 자유와 평등을 위한 민중들의 연대와 협력도 없지 않았다. 국가주의와 민족주의를 넘어 다른 민중과 시도한 다양한 협력과 연대의 모습은 물론, 폭력과 전쟁에 반대하는 활동 등을 조사 발굴해 함께 나눌 필요가 있다. 이처럼 서로 연결되어 있는 과거의 역사를 함께 공부하고 답사하며 토론하는 연대의 장은 아직 소수이고 여전히 어렵지만, 동아시아 시민성을 구축하기 위한 소중한 자양분이 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