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송이 멸망하고 남송이 건국되던 시기에 화북민이 대량으로 남천(南遷)하였고, 이들의 이주는 한동안 지속되었다. 기왕의 연구에 의하면 당(唐) 중기의 인구는 6천만 명으로, 황하 유역의 밀농사 지대에 거주하던 인구가 60%에 달하였고 40%가 강남에 거주하였으나, 상황이 점차 역전되어서 12세기 말 장강 이남의 인구는 송 전체 인구의 60%를 차지하게 되었다고 한다. 화북민이 이주함에 따라 북방에서 재배되던 작물들 역시 남방으로 유입되었는데, 특히 주목할 만한 작물이 맥류(麥類)이다. 남방의 주식인 쌀은 남천(南遷)한 화북민들의 입맛에 맞지 않았고, 기름으로 이 문제를 해결하게 되면서 기름을 이용한 요리가 증가하였다는 연구결과도 있듯이, 식습관을 바꾸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기에 남쪽에서도 맥식(麥食)이 유행하면서 맥류 수요가 증가하였다.
송대에 대맥(大麥)은 주로 마료(馬料)로 사용되거나 맥반(麥飯)으로 소비되었고, 소맥(小麥)은 밀가루로 가공되어 병(餠)과 면류(麵類)로 만들어지거나 술을 만드는 누룩의 재료가 되었다. 그런데 소맥의 경우 쌀처럼 낟알로 섭취할 수 없고 가루로 내야 하기 때문에, 제분기술이 뒷받침되어야 한다. 고대에는 사람이 직접 돌판, 맷돌 등의 도구를 이용하여 작업했기 때문에 얻을 수 있는 밀가루 분량이 많지 않아 가격도 비쌌지만, 제분기술이 발달하면서 밀가루 대량생산이 가능해지고 가격도 저렴해졌다. 이는 당대에 연애(碾磑)가 사회적인 문제로 대두된 상황을 통해 알 수 있다. 연애는 수력이나 축력을 이용하여 돌을 돌려서 제분하는 공구이다. 사례를 몇 가지 살펴보면, 무측천 영휘 6년(永徽, 655)에 옹주(雍州)에서는 부자와 관리들이 설치한 년애가 제방을 막고 물을 소비하여 관개(灌漑)할 수 있는 농경지가 4만 경에서 1만 경으로 감소하였는데, 시간이 지나 대종 대력연간(大曆, 766-779)에 이르면 관개되는 수전이 6,200여 경 정도로 더욱 감소한다. 실제로 대종 때에는 대종의 딸 승평공주와 시아버지 곽자의(郭子儀) 등 권문세족들이 설치한 수연애(水碾磑) 때문에 백성들이 관개하기 어려워 연애 철폐를 명하기도 하였다. 현종대에는 유명한 환관 고력사(高力士)가 경성(京城) 서북지역에서 풍수(灃水)를 막아 연애를 만들어 하루에 맥(麥) 300곡(斛)을 제분하였다고 한다. 즉, 이러한 기록들을 통해 당대에 이미 물을 동력으로 하는 제분업이 상당히 발전하였음을 알 수 있다. 이렇게 제분기술이 발달하자 생산비가 감소하여 밀가루 가격이 저렴해졌고, 일반서민들의 식생활에 변화가 나타나기 시작하였는데, 송대에 이르면 다양한 종류의 만두와 국수가 등장하였고, 도시의 발달과 더불어 국수가 소위 서민들을 위한 패스트푸드가 되었다. 남송의 수도 임안(臨安)을 묘사한 『몽량록(夢梁錄)』과 『무림구사(武林舊事)』에도 맥류가 사용된 음식이 많이 수록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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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1 『왕정농서(王禎農書)』 수연(水碾)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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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2 『왕정농서(王禎農書)』 석연(石碾)
이렇게 남송대에 면식이 크게 유행하였지만, 북송대까지 장강 이남에서는 맥류를 그다지 재배하지 않았고 주곡작물은 여전히 수도(水稻)였다. 강남에서 맥작(麥作)이 성행하게 된 것은 상술하였듯이 화북민 이주 이후의 일이다. 맥류는 특성상 물에 약하다. 습도가 적절한 상태에서 파종해야 하며, 수확기에는 습기를 더욱 조심해야 한다. 게다가 성숙기에 이삭이 물에 젖으면 발아하는데, 이러한 이삭은 종자용이나 식용으로 적합하지 않기 때문에, 비를 맞기 전에 시간을 다투어 수확해야 한다. 그러나 강남은 수자원이 풍부하고 강우량이 많으며 습도가 많은 지역이기 때문에 맥작에 적합한 지역은 아니다. 실제로 『송사(宋史)』에는 송대 여러 지역에서 맥작에 지장이 있었음을 알려주는 기록이 다수 있는데, 이러한 상황은 남송대 양절로(兩浙路)에 집중되어 있다. 양절로는 송대 농업 선진 지역으로, 남송대에 맥류생산을 이 지역에 의지하였기 때문에 그만큼 맥작을 망친 사례도 많은 것으로 추측된다. 남송 양절로에서는 실제로 적지 않은 수한재(水旱災)가 발생하였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맥류가 대량으로 재배ㆍ생산ㆍ소비되었는데, 자연 환경적인 조건을 바꿀 수는 없으므로 결국 농민들이 노력하여 기술적인 측면을 개선했다고 보아야 하겠다.
맥류는 물이 많은 곳에서 재배하기 어렵기 때문에 배수가 중요하다. 하지만 남송대에는 평지에서의 배수 기술을 갖추지 못하였기에 대체로 배수가 잘 되는 고지대에서 맥작을 시행하였다. 산간 구릉지와 같이 지대가 높은 곳에서는 지형적 특성으로 인해 계단식 농지인 제전(梯田)이 출현하게 되는데, 남송 관료 범성대(范成大, 1126-1193)의 『참란록(驂鸞錄)』에서 제전이라는 정식명칭이 최초로 나타난다. 남송의 농민들은 바로 이 제전에서 도맥(稻麥)이모작을 통해 맥류를 생산한 것이다. 맥류는 춘맥[春麥, 봄밀ㆍ보리]와 동맥[冬麥, 겨울밀ㆍ보리]로 나뉜다. 춘맥은 음력 3월경에 파종하여 8월에 수확하고, 동맥은 7-8월에 파종하고 이듬해 3-4월에 수확한다. 따라서 송대 농민들은 봄부터 가을까지 벼농사를 진행하고, 가을에 벼를 수확한 후 겨우내 동맥을 재배하는 이모작을 시행하였다. 남송대 농서인 『진부농서(陳旉農書)』에서 고전(高田)의 이모작 사례를 찾아볼 수 있는데, “고개나 비탈진 땅에 채소, 참깨, 맥, 조, 콩을 심는다.”라고 하여 제전의 이용 방법을 제시하였고, “논에 수확을 마치면 즉시 갈이하고 햇볕에 말려 거름을 주고 배토하여 콩류, 맥류, 채소류를 파종한다.”라고 하여 고전에서의 이모작에 대해 기술하였다. 이밖에 송대 시인들의 작품에서도 제전에서 맥류가 재배되었던 정황을 찾아볼 수 있다. 양만리(楊萬里, 1127-1206)는 산에 푸른 맥이 상당히 많음을 묘사하였고, 육유(陸游, 1125-1210)는 산촌 곳곳에서 비가 개고 맥을 수확하는 모습을 읊었으며, 범성대는 고전에 맥이 끊임없이 펼쳐져 있다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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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3 제전[曾雄生 저 『中國農業通史』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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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4 중국 제전[www.chinanews.com.cn 발췌]
남송대 강남에서 맥작을 가능하게 했던 또 하나의 기술은 시비(施肥)기술이다. 예나 지금이나 작물을 재배할 때 비료가 반드시 필요한데, 비료를 전혀 주지 않고 천연양분만으로 농사를 할 경우 벼는 70-80%를 수확할 수 있지만, 맥류 수확량은 30-40%밖에 되지 않기 때문에 도맥이모작을 하려면 비료를 줘야 한다. 비료의 4요소 중 가장 중요한 것이 질소로, 퇴비는 전통적인 질소비료의 하나이다. 퇴비는 짚이나 잡초, 낙엽, 동물의 변 등을 퇴적하여 발효시킨 비료인데, 송대에는 이미 선진적인 퇴비 제작 기술을 보유하였다. 앞서 언급한 『진부농서』를 살펴보면, 청소하면서 생긴 흙, 불에 태운 초목의 재, 탈곡 후에 생긴 곡물의 겨나 쭉정이, 흐트러진 볏짚과 낙엽 등을 쌓아두고 태운 후 그 위에 분뇨를 뿌려 오랫동안 쌓아두는 방식을 제시하였다. 이를 통해 알 수 있는 점은 두 가지로, 첫째, 주변에서 쉽게 구할 수 있는 재료로 퇴비를 만들어 농민의 경제적 상황에 도움이 되었다. 둘째, 분뇨 특히 인분뇨를 사용하여 퇴비를 만들었는데, 이는 이전 시기에는 보기 드문 선진적인 기술이었다. 이러한 정황들을 통해 송대의 농민들은 자연조건에 순응하지 않고 다양한 기술과 방식을 통해 농업생산을 확보하기 위해 노력하였음을 알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