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3월 10일, 한 중국발 기사가 국내 인터넷 포털 뉴스 란에 올라오기 시작했다. 바로 이날 베이징 인민대회당에서 열린 전국인민대표대회 14기 제1차 회의 제3차 전체회의에서 국가 주석 시진핑이 국가 주석과 중앙군사위원회 주석으로 재선출 되었다는 소식이었다. 언론은 시진핑 국가주석이 ‘3연임’을 공식 확정했다는 사실과 당ㆍ군ㆍ정을 아우르는 ‘1인 장기 집권 체제’의 기반을 마련했다는 소식을 내보냈다. 이에 대한 반대표나 기권표가 한 표도 없었다는 사실도 아울러 적시하였다. 1)
사실 시진핑 국가주석의 3연임은 이미 예견된 일이었다. 2018년 3월 전국인민대표대회에서 국가 주석 임기 제한을 규정한 헌법조항을 삭제하기로 결정하였기 때문이다.
시진핑 국가주석의 연임 소식은 이전부터 베이징의 한 대학에서 유학 생활을 하는 지인으로부터 소상히 들었기에 놀랄만한 일은 아니었다. 그보다 국내 언론사의 논평이 눈길을 끌다. “황제 등극 시진핑” 2)
, “황제와 총리: 시진핑-리창은 황제-신하의 군신 관계” 3)
등 논조로 꽤 오랫동안 인터넷 뉴스 페이지의 앞자리를 차지하였다. 반대 없이 3연임에 성공한 데다 총리를 비롯한 권력 서열 3~4위 인사도 시 주석의 측근으로 선출되었다 하니 사실상 ‘황제’라는 논조도 이해할 수 있었다. 문득 1911년 신해혁명으로 공화정이 수립된 이후, 위안스카이가 1915년에 ‘홍헌제’를 칭하면서 군주제 국가인 ‘중화제국’으로 복고하고 관료 선발을 위해 과거제를 복구한 일이 떠오르기도 하였다.
돌이켜 보면, 역사상 중국 왕조는 국가 체제가 전환될 때마다 ‘복고’ 경향이 뚜렷했다. 주왕조가 본격적으로 실시한 ‘봉건제’는 기원전 221년 진왕 영정이 한ㆍ조ㆍ연ㆍ위ㆍ초ㆍ제국을 무력으로 합병한 후, 전국에 확대 실시한 ‘군현제’의 의해 대체되었다. 이 일은 중국 역사 전체에서도 중요한 분기가 되는 사건이다. 그러나 진 제국을 무너뜨린 항우는 기원전 206년에 제후왕 18명을 분봉하였고, 항우의 초를 멸하고 한 제국을 건국한 유방 역시 기원전 202년에 자신의 직할지를 제외한 나머지 제국 영역에 주요 공신 7명을 포함하여 수많은 제후를 분봉하였다. 기원전 127년, 주금법ㆍ추은령 등을 시행하여 제후의 영지를 약화시키고 사실상 군현제를 정착시켰다고 평가받는 한 무제 이후에도 봉건제의 그림자는 사라지지 않았다. 265년 서진을 건국한 사마염은 번왕 27명을 전국에 분봉하여 봉건제로 ‘복고’하기도 하였으니 말이다. 더구나 서진의 봉건이 군현제를 정착시켰다고 하는 한 무제 시기로부터 약 400년 이후의 일이니, 1911년 공화정이 수립된 이후 2023년까지 약 100년 남짓 지난 현재에 ‘황제’라는 단어가 언론에 등장하는 것도 어쩌면 낯선 일이 아닐지 모른다. 그렇다면 중국은 여전히 황제지배체제의 그림자 아래에 존재하는 것일까?
서구 사회에서 근대화의 열풍이 불 때 세계는 민족주의와 그로 인한 어두운 역사를 경험하였다. 또, 근대화에 대한 맹신이 남겨놓은 상처를 치유하기도 전에 다시 냉전의 시대를 맞이하게 되었다. 현재, 세계 주요 국가는 한편으로 근대화의 굴절된 역사를 경험하면서도 한편으로 근대화의 어두운 그림자를 치유, 반성, 극복하고 보다 선진화된 사회를 위해 경주하는 중이다. 동아시아의 경우 한ㆍ중ㆍ일 세 나라 가운데 한국과 일본은 각기 과정과 방법은 달랐지만 현재 고도의 근대화 사회에 진입하였고, 높은 수준의 민주화도 이루어 냈다. 다만 중국의 경우는 달랐다.1949년 10월 1일, 중화인민공화국 수립을 선포한 이후, 마오저뚱은 1959년 대약진 운동에 실패하고 국가 주석직을 사임하였지만, 다시 중국 공산당 주석으로서 1976년 사망할 때까지 권력을 놓지 않았다. 1980년 이후 집권한 덩샤오핑이 근대화에 시동을 걸고, 이후 눈부신 발전을 이루어냈지만 민족 갈등과 지역 격차, 빈부 격차, 부패는 여전하고 ‘중국식 사회주의’의 틀은 여전히 깨지 못하였다. 그리고 민주주의는 아직 요원한 것처럼 보인다.
동아시아 3국 가운데 전근대를 주도했던 중국이 어째서 과거에 확립한 틀에서 쉬 벗어나지 못하는가? 중국은 어째서 고도로 근대화된 국가 대열에 합류하지 못하는가? 중국은 어째서 민주사회로의 진입을 시도조차 못하는가? 이는 시진핑이 세 번째 국가 주석직 연임에 성공한 현재에 유효한 토론거리다. 이 문제에 대해 화두로 삼은 저작이 바로 3000년 중국역사의 어두운 그림자다. 필자는 이에 대한 여러 학자의 주장을 소개하였다. 바로 2,000년 간 지속된 황제지배체제 아래에서 국가로부터의 약탈적인 경제구조가 자본주의로의 발전을 저해했다는 주장, 주기적인 대동란이 자본주의의 맹아를 없애버렸다는 주장, 전근대 중국의 도시가 통제의 대상이었기 때문에 상공인의 자율성이 억압받았다는 주장, 풍부한 노동력이 노동력 조직 기술 향상에는 유리했지만 기술 발전에는 동기를 부여하지 못하였다는 주장 등이다. 이 저작은 이상 여러 학자의 주장을 긍정하면서 또 하나의 중요한 이유를 제시하였다. 바로 중국의 진화를 가로막은 뿌리 깊은 유교적 ‘가치관’이다.
다시 시대를 거슬러 올라가 보자. 기원전 6세기 말에서 5세기 무렵 동주 시대에 살았던 공자는 충과 효에 기반한 유학 사상의 기초를 닦았다. 이후 전한前漢의 조정은 유학을 정치 사상으로 받아들이기 시작하였다. 전한 선제宣帝 당시에 “유가 경전을 공부하여 삼공三公이 되는 것은 마치 허리를 굽혀 풀을 뽑는 것과 같다.”라고 하후승夏侯勝이 말한 바가 있으니, 전한 중기 이후가 되면, 유학 지식이 관료 선발의 기준이 된다는 사실은 의심할 바 없겠다. 한 제국은 이로부터 약 100여 년 지난 후한 초, 공자 신격화 작업을 거쳤고, 유교는 ‘국교화’ 되었다. 그리고 이후 2,000여 년 간 유가 경전은 정치적 지위를 획득하는 주요 수단이 되었다. 과거 시험의 주요 과목은 유가 경전이 되었다. ‘황제’의 권위 역시 유교에 의해 더욱 강화되었다. 후한 시기 초부터 청 말까지의 중국사회에 대해 필자는 이렇게 지적한다.
“중국의 위정자와 지식인은 황제에 대한 충과 부모에 대한 효를 근간으로 하는 도덕으로 자기를 다스리고 민들을 교화하기만 하면 태평한 세계를 이룰 수 있다고 확신했다. 이런 사상과 이념을 바탕으로 국가와 사회의 체제를 기획하고 설계했다. 관료들은 충효와 청렴한 도덕을 갖추고 있으면 충분했고, 민들은 부모에 효도하고 관료들의 가르침에 순종하기만 하면 좋은 백성이었다. 이것으로 태평성세를 이룰 수 있다고 확신했기 때문에 다른 세계 문화는 염두에 두지 않았다.”4)
중국은 외부로부터 ‘수많은’ 충격을 받았다. 한이 멸망한 후 중원의 중북부 지역은 다섯 이민족이 차지하여 300년 가까이 다투었다. 수ㆍ당 제국 시대를 지나 송대에 이르러, 동북쪽에서 거란족과 여진족이 군대를 거느리고 내려왔다. 당시 하서河西 지역에 자리잡은 서하西夏와 북쪽의 거란ㆍ여진, 그리고 남쪽의 남송이 각기 ‘황제’를 칭했으므로 남송 지식인이 ‘정통’에 대해 열변을 토한 일도 당연한 일이었다. 이후 몽골족과 만주족이 내려와 다시 침략 전쟁을 벌였다. 19세기에는 영국과 프랑스 등 서양 열강이 베이징을 유린하기도 하였다. 그럼에도 유교에 입각한 “정치 체제나 사회 질서의 근간을 흔들 만한 어떤 자극도 주지 못했다.” 외부로부터의 충격만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진 말 진승ㆍ오광의 난부터 청 말 태평천국의 난까지 내부에서 10여 차례 발생한 왕조 교체기의 대동란이 있었다. 이 대동란은 중국에 심각한 상처를 남겼지만 다시 새로운 왕조가 일어서면 새 ‘황제’에게 충성을 바쳐 ‘부귀영화’를 추구하면 그만이었다. 필자는 말한다.
“중국 사회가 지위, 특히 정치적 지위를 지향하는 성향을 갖게 된 것은 과거를 통한 관직 획득에 높은 사회적 가치를 부여해 온 오랜 전통이 크게 작용했을 것이다. 더구나 중국의 전통법은 극히 특수한 신분인을 제외하고 모든 민들이 과거 시험에 참여할 자격을 배제하지 않았다. 아마 위정자들은 모든 민들에게 황제에 대한 충과 부모에 대한 효의 이념을 확산시키는 것이 체제 안정에 도움이 될 것이라 기대하여 이런 법적 장치를 마련했을 것이다. …… 이런 사회 성향이 근대 학문 및 산업기술과 같은 외래 문명을 받아들이기 힘든 사회 분위기로 만든 것 같다.”4)
황제 지배체제의 관성이 여전히 중국 사회를 지배하고 있으며, 이 때문에 뒤늦게 시작하여 150여 년간 진행된 근대화 과정도 ‘굴절’되고 ‘왜곡’될 수 밖에 없었다는 필자의 의견은 중국 역사에 대한 깊은 이해에서 나온 정확한 지적이다. 어떤 중국 전문가는 3연임에 성공한 시진핑이 4연임을 길을 걷고 있다는 전망을 내놓기도 하였다. 어쩌면 2,000여 년간 지속된 황제 지배체제의 ‘어두운 그림자’가 여전히 중국 사회에 드리워져 고도화된 근대화, 민주화로 가는 길목을 가로막은 것은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