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랭크 돈의 베이징 지도(1936년)
베이징 거리에서 종이지도가 사라진 지 오래다. 19년 전 처음 갔을 때만 해도 곳곳의 신문가판대에서 지도를 팔았다. 베이징을 방문하는 이들뿐만 아니라, 베이징 시민들에게도 지도는 필수품이었다. 매년 개정판이 나오는 교통여행지도는 더욱 그랬다. 이제는 그 누구도 지도를 들고 길을 찾지 않는다. 스마트폰 안의 전자지도가 이를 대체했다. 정확하고 정보량도 훨씬 많다. 동서남북을 헷갈릴 일도 없다. 찾아갈 길을 정확히 알려주니 지도를 열심히 파고들 필요도 없다. 종이지도에 비해 한없이 편리한데, 종종 인쇄된 지도가 그립다. 종이라는 물성뿐만 아니라, 축소와 확대가 안 되는 지도는 전체에서 부분으로, 부분에서 전체로 공간을 보여준다. 이미 인쇄된 이미지 위에 업데이트는 불가능하지만, 그렇기에 시대상을 보여주기도 한다.
2004년 쉐위안출판사(學苑出版社)에서 옛 지도 한 장을 인쇄해 팔았다. <라오베이징 풍속 지도(The Map of Old Beijing Folklore)>라는 제목의 지도였다. 이 지도는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다. 출판 당해 중국의 유명서점인 중국서점에서 가장 많이 팔린 상품이었다. 당시 지리정보를 담은 지도는 아니었다. 1936년에 제작된 지도였다. 정확한 척도로 그려지지도 않았다. 반면, 다채롭고, 흥미로우며, 풍부한 인문 정보를 담고 있었다. 제작자가 중국인도 아니었다. 프랭크 돈(Frank Dorn, 1901∼1981)이라는 미국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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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랭크 돈이 제작한 A Map and History of Peiping
출처: archive.org
프랭크 돈은 참으로 흥미로운 인물이다. 군인이었고 육군 준장으로 전역했다. 1942년 인도·미얀마·중국 전역(戰域)의 미국군 총사령관으로 부임한 조지프 스틸웰의 핵심 보좌관이었다. 계획에 그쳤지만, 스틸웰과 함께 장제스 암살을 공모했다. 1943년 중국원정군 고문단 단장을 맡았으며, 1944년 맥아더 장군의 수석 보좌관을 지냈다. 그의 지도만 보면 상상하기 어려운 화려한 군경력이다. 이상할 게 없다. 어릴 적부터 군인을 꿈꿨지만, 고등학교 시절 California School of Fine Arts(현재 San Francisco Art Institute)의 수업을 들으며 예술적 재능을 꽃피웠다. 졸업 즈음 진로를 고민했다. 군인과 예술가는 전혀 다른 길이었다. 결국 재능을 포기하고 어릴 적 꿈을 따라 사관학교에 입학하였다. 사관학교를 졸업하고 필리핀과 중국에서 복무하였다. 1932년부터 1938년까지 베이징에서 근무했다. 끔찍했던 베이징에 대한 인상과 달리 그는 베이징에 푹 빠졌으며, 예술적 재능은 지도로 재현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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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운데가 프랭크 돈, 우측이 조지프 스틸웰이다. 좌측은 클레어 부스 루스(Clare Boothe Luce, 1903~1987)
출처 : LIFE. 1942년 6월 15일.
프랭크 돈의 베이징 지도의 원래 이름은 『베이핑 지도와 역사』(A Map and History of Peiping)이다. 당시 베이징은 중국의 수도가 아니었다. 국민당은 북벌에 성공하고 난징(南京)을 수도로 삼았다. 베이징은 수도의 지위를 잃었고, 수도를 뜻하는 ‘경(京)’이라는 이름도 잃었다. 베이징이 아닌 베이핑(北平)이 되었다. 그러니 지도 이름에 당시 이름인 베이핑이 들어간 것이다. 지도의 중앙 하단에는 베이징에 관한 간단한 영문 설명이 있고, 중앙 상단에서 오른쪽으로 이어지는 테두리에 27장의 그림이 있다. 주나라 시기부터 쿠빌라이칸의 원 대도(大都) 시기, 마르코 폴로의 방문, 명나라 마지막 황제 숭정제의 자살, 건륭제, 서태후, 의화단 사건, 신해혁명, 난징으로 천도까지의 역사를 다루고 있다. 마지막 그림에서 책, 서화, 문방사우 등을 그리고 ‘중국의 문화수도(CULTURAL CAPITAL OF CHINA)’라고 설명한 것이 흥미롭다.
지도의 생명은 정확성일 텐데, 틀린 곳부터 찾아보자. 자금성 오른쪽에 학사모와 책 모양으로 표시된 곳이 있다. 영어로 ‘PEI TA UNIVERSITY’라고 쓰여 있다. 대학인 것은 알겠는데 PEI TA은 어디일까. 북경대학으로 정식 명칭은 ‘Peking University’이다. 북경대학은 북대(北大)라고 줄여 부르는 데 약칭을 학교명으로 쓴 것이다. 현재 저 자리에 북대는 없다. 중화인민공화국 수립 이후 민국 시기 연경대학 자리로 옮겼다. 옛 빨간 벽돌 건물은 북대홍루(北大红楼)라 불리며 신문화운동기념관이 되었다.
‘PEI TA UNIVERSITY’ 동쪽으로 ‘Morrison Street(Shopping)’가 보인다. 거리 옆으로는 ‘TUAN AN SHIH CHANG(MARKET)’이라고 표시되어 있다. TUAN AN SHIH CHANG은 청말 민국 시기 베이징 4대 시장 중 하나였던 동안시장이고, 현재 왕푸징 거리인 Morrison Street에 있었다. 이 거리는 유구한 역사가 있다. 원나라 시기는 정자가(丁字街)로 불렸고, 명나라 시기에는 왕부가(王府街)로 불렸다. 이 길이 왕푸징(王府井) 거리로 바뀐 것은 1905년에 이르러서다. 그런데 발음을 옮긴 것도 아닌 영문 이름은 뜬금없다. 여기서 모리슨은 영국 저명 기자였던 조지 모리슨 (George Ernest Morrison, 1862-1920)을 가리킨다. 그는 호주에서 태어났으며, 1897년부터 1912년까지 영국 『더 타임즈』 베이징 특파원을 지냈다. 민국 초년에는 위안스카이(袁世凱)의 외국인 고문이 되었고 1919년 파리평화회의 중국외교단의 외국인 자문으로도 활동했다. 왕푸징이 모리슨이 된 것은 그가 왕푸징 거리 100호에 살았기 때문이다. 위안스카이가 그의 공헌을 기념해 거리명을 바꿨다.
과하다는 생각이 들기도 하지만 모리슨의 집은 특별했다. 그는 베이징에서 생활하는 동안 수많은 중국 책을 수집해 개인 도서관을 세웠다. 장서 수가 무려 24,000여 권에 달했다. 이 도서관은 1917년 미쓰비시의 전 사장인 이와사키 히사야(岩崎久彌)에게 35,000파운드라는 거액에 매각됐다. 모리슨이 처음부터 일본에 팔고 싶었던 것이 아니었다. 당연히 자신의 자료가 중국에 있길 바랐지만, 중국에서는 적정한 가격을 제시하는 이가 없었다. 미국의 여러 대학도 관심이 보였지만, 그는 자료가 동아시아에 남길 바랐다. 결국 일본인의 손에 넘어갔고, 이후 일본의 저명 동양학 전문 도서관인 동양문고의 초석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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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리슨 도서관. 중앙에 있는 인물이 모리슨이며, 우측에는 책을 도쿄로 옮겨가는 일을 감독한 이시다 미키노스케(石田幹之助)
출처 : State Library of New South Wales
모리슨 거리의 서쪽을 따라 성문밖으로 나가 보자. P’ING TSE MEN이 보인다. 이 문은 평칙문(平則門)으로 명청 시기 이름은 아니다. 원나라 때 명칭이며, 명대 부성문(阜成門)으로 바뀌었고, 지금까지 부성문(푸청문)으로 불리고 있다. 성문을 나와 다리를 건너고 철도를 넘으면 ‘GOLF COURSE’가 보이고, 밑으로 ‘PAO MA CHANG’이 보인다. 골프장과 경마장이다.
골프장은 두 곳이 있다. 하나는 성인 남녀가 골프를 즐기고 있는 모습이고, 다른 하나는 한 남자가 한 아이와 골프를 치고 있는 모습이다. 이 중 성인 남녀로 묘사된 골프장은 티엔춘산(田村山)에 위치한 골프장이었다. 중국에 근대 스포츠로 골프가 들어온 것은 19세기 말로, 현재 찾아볼 수 있는 기록으로 1897년 마카오의 구란위(鼓浪嶼)에서 골프를 즐겼다는 기록과 1902년 영국이 웨이하이에 골프장을 만들었다는 기록이 있다. 베이징에 처음 골프장이 생긴 것은 민국 초이다. 민국 초 북양정부 시기 교통과 재정 부분 고위 관료를 지냈고 교통은행 총리를 맡았던 양사이(梁士詒)가 티엔춘산 부근의 땅을 구입하고 투자자를 모아 만국 골프장(萬國高爾夫球場)을 세웠다.
밑에 그려진 골프장은 원래 만주족 팔기들이 말을 타던 곳이었는데, 민국 시기 들어 공터로 남았다. 정식 골프장은 아니었지만, 일부 서양인들이 그곳에서 골프를 즐겼다. 그림에서 흥미로운 것은 골프가방을 들고 있는 아이이다. 20세기 30년대가 되면 중국 전역에 골프장이 많아지는데 보통 아이들이 골프장에서 캐디를 했다. 이런 아이들을 구동(球童)이라고 불렀다. 그 시절만 해도 아동 노동이 엄격하게 금지되던 시절이 아니었다.
골프장 밑으로 보이는 것은 ‘RACE COURSE’, 즉 경마장이다. 20세기 30년대에 중국에서는 경마장이 크게 유행했었다. 민국 시기 경마장에 관해서는 제임스 카터의 『1941년, 챔피언의 날 - 옛 상하이의 종말』(신기섭 옮김, 마르코폴로, 2023)에 잘 나와 있다. 아쉽게도 상하이 경마장 이야기지만 말이다. 베이징에 경마장이 처음 생긴 것은 청말 민초 시볜먼(西便門) 밖 200여 무에 달하는 터를 서신구라부(西紳俱樂部)가 차지하면서다. 서신은 서양 신사를 뜻하며, 이 구락부의 주요 고객은 서양인이었다. 1920년대 한 달 회비가 약 10달러인 고급 클럽이었다. 서신구락부는 프랭크 돈의 지도 중 대사관 구역(LEGATION QUARTER)에 ‘PEKING CLUB’으로 표시되어 있다. 시볜먼(西便門) 밖에 경마장이 세워졌고, 매년 봄과 가을 6개월 정도 경기가 열렸다. 경기가 열릴 때는 당연히 마권이 판매되어, 항상 사람들로 북적거렸다. 이곳은 시 중심과 기차로 연결되어 있어 교통도 편리했다. 전문의 기차역에서 기차를 타고 옌화츠(蓮花池) 역에서 내려 조금만 걸으면 경마장이 있었다.
마지막으로 교통수단들을 살펴보자. 자동차, 자전거, 기차, 인력거 등이 눈에 보인다. 인력거를 제외하면 오늘날 베이징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교통수단이다. 그런데 당시 중국 대도시에서 유행하던 전차가 안 보인다. 베이징에 전차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1924년 비교적 늦게 도입됐는데 톈진보다도 늦었다. 1924년 첫 노선이 개설된 이래 1948년까지 베이징에 개설된 전차 노선은 6개에 불과했다. 총거리는 50km가 되지 않았다. 천년고도인 베이징은 복잡한 골목과 수많은 유적이 있어 전차가 들어서기 어려웠다. 전차를 운행하려면 전차 철로를 가설해야 하는데, 당연히 철거가 이루어질 수밖에 없었다. 사람들의 반발이 엄청났다. 여기에 베이징 거리에 최적화된 인력거꾼들은 생계를 위협받았기에 거세게 반대했다. 상황이 이러니 베이징의 전차 승차율은 17%에 불과했다.(당시 중국 내 평균 승차율은 35% 정도였음) 노선도 짧고 차표도 비싸니 널리 이용될 리 만무했다.
현대식 교통수단을 보기 좋게 누르고 베이징에서 가장 사랑받던 교통수단은 인력거였다. 스차차하이(什刹海)에서 인력거 관광을 해 보신 분들은 잘 아시겠지만, 복잡하고 비좁은 골목 곳곳을 누비기에 인력거만 한 게 없다. 70여 년 전의 베이징은 더욱 복잡했을 테니 지금보다 더 유용했을 것이다. 인력거는 중국 전통 교통수단이 아니다. 청말 일본으로부터 들여온 ‘신식’ 문물이었다. 기계의 시대에 사람이 끄는 수레가 신식이라니 이상하지만, 중국 사람들에게는 보지 못한 새로운 물건이었다. 전차가 자리 잡지 못한 베이징에서는 인력거가 사랑을 받았다. 1901년 첫 인력거 회사가 생긴 이래 1930년대에 이르면 30여 개 회사가 경쟁했다. 당시 베이징 인구의 5%가 인력거꾼으로 일했다. 물론 좋은 일자리는 아니었다. 라오서의 소설 『낙타샹즈』(심규호·유소영 번역, 황소자리, 2008)에는 고달팠던 베이징 인력거꾼의 이야기가 생생하게 묘사되어 있다.
프랭크 돈의 지도에는 천단, 옹화궁, 융복사, 동악묘, 유리창 등 청나라 때 유명했던 장소들도 표시되어 있다. 1930년대 베이징은 전통적인 풍경과 새로운 풍경이 혼재되어 있었다. 너무나도 당연한 근대의 풍경이지만, 베이징은 그 어떤 도시보다 전통의 모습이 짙었다. 당시 베이징은 원나라 시기 대도부터 치자면 700년 가까이 제국의 수도였고, 곳곳에 오랜 역사와 문화가 겹겹이 쌓여있었으니 당연한 얘기다. 프랭크 돈이 그려낸 베이징의 이미지는 오늘날까지 살아있다. 마오쩌둥이 신중국을 세우고 베이징을 수도로 삼으며 성벽을 부셔버렸지만, ‘라오베이징’은 사라지지 않았다. ‘베이핑 지도와 역사’라는 원제목이 ‘라오베이징 풍속 지도’로 그냥 바뀐 것은 아니다.
창원대학교 손성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