落地生根, 남의 나라가 “우리나라”가 되기까지:
동아시아 각 나라의 明 遺民들
17세기 동아시아에는 일대 변화의 바람이 불어닥쳤다. 지난 세기말부터 일어난 전쟁의 여파와 내부의 소요로 인해 동아시아의 큰 형님 명나라는 힘을 잃어가고 있었고, 조선은 전쟁 이후 세력을 회복하기에 여념이 없었다. 전쟁을 일으켰던 일본에서도 전쟁을 주도한 도요토미(豐臣) 세력이 점차 몰락하고 도쿠가와(德川) 세력이 그를 대체하기 시작하였다. 그 사이 중국의 동북 지역에서는 누르하치가 이끄는 여진족이 성장을 거듭하여 동북 지역의 주요 도시를 점령하고 후금(後金)을 건국하였다.
조금 더 시야를 확장해보자. 17세기 베트남은 후기 레(黎 Lê) 왕조 시기로 통일 왕조 체제였지만, 왕조가 관할하는 북쪽 지역은 찐(鄭 Trịnh)씨가 남쪽 지역은 응우옌(Nguyễn 阮)씨가 실질적인 힘을 행사하며 왕조 안에 두 국가를 세운 상황과 다름없었다. 류큐(琉球)는 장기간 독립을 유지하고 명나라와 조공-책봉 관계를 유지하였다. 그러나 1609년 일본 규슈(九州) 남부 사츠마(薩摩) 번 시마즈(島津) 가문에게 공격받은 이후, 류큐는 명의 책봉국이면서 사츠마의 속국이라는 특수한 상태에 처하게 되었다. 대만의 상황도 크게 변했다. 1624년, 네덜란드 동인도회사가 따이완(大員, 현재의 臺南)으로 들어와 도시를 건설하였고, 1626년, 스페인이 께랑(鷄籠, 현재의 基隆)으로 들어와 새로운 무역기지를 세웠다. 이들은 본래 대만섬에 거주하고 있었던 오스트로네시아어족의 원주민들과 대립하며 발전하였다. 네덜란드동인도회사는 경쟁에서 우위를 점하기 위하여 섬 개발에 열중하였는데, 이때 필요한 노동력은 한인(漢人)을 통해 채우고자 하였다.
동아시아의 중심이었던 중국의 명나라가 이렇게 복잡한 시대적 상황과 맞물려서 힘을 잃어가게 되자, 명나라에 거주하고 있던 한인들은 정치·경제적 이유로 중국을 이탈하기 시작하였다. 요동 근처에 거주하고 있던 다수의 한인은 국경을 인접하고 있던 조선으로 들어가기 시작하였고, 중국 동남부 연해안 지역의 복건, 광동 일대의 한인은 대만, 필리핀, 베트남, 인도네시아, 오키나와 등 바닷길을 통해 나아갈 수 있는 지역으로 이주하기 시작하였다.
명나라의 위기는 어떤 노력으로도 가라앉아지지 않았다. 반란 하나가 끝나면 또다시 반란이 일어났고, 고작 몇 주 만에 도시 여러 개가 후금의 손에 떨어지고는 하였다. 급기야 명 정부는 반란 세력 이자성(李自成)에게 북경을 내어주었고, 수도를 지키지 못한 황제 숭정제(崇禎帝)는 자살하기에 이르렀다. 여기에 후금에서 이름을 바꾼 청의 맹공이 거듭되자 중국 내부에서도 대이동이 시작되었다. 전쟁의 불길을 피해 살아남은 사람들은 이제 나라를 잃은 유민(遺民)이 되어 살길을 찾기 시작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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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1 대순(大順)을 세웠던 틈왕(闖王) 이자성(李自成)
출처: 看中國 Vision Times
유민들의 신분은 가지각색이었다. 관료나 군인 출신도 있었고, 관직은 없지만 부유한 상인도 있었다. 물론 아무것도 없이 그저 몸만 도착한 사람도 있었다. 이들의 처지는 달랐지만, 모두 나라를 잃었다는 점에서 공통점을 찾을 수 있었다. 당연하게도 새로운 나라에서 적응하며 살아간다는 것이 결코 쉬운 일은 아니었다. 기존의 신분이 그대로 적용될 리도 만무하였으므로 관료나 군인 출신의 유민일지라도 그 나라 시스템의 밑바닥에서부터 시작한 경우가 많았다.
조선으로 들어온 명 관료, 군인 출신 가문의 후예들은 변경 지역에서 보통 조선 사람들과 다름없이 생활하였다. 청나라가 명 유민을 빌미로 언제든 다시 침입해올 수 있다는 위기의식이 있었기 때문에, 이들을 의도적으로 숨겼기 때문이다. 효종(孝宗: 1649~1659)이 조선으로 귀환할 때 같이 넘어온 일부 유민은 특별한 우대를 받아 서울 안에 자리를 잡고 왕과 가까운 곳에 처소를 두게 하였지만, 이 사례를 제외하고 조선의 명 유민들은 대체로 1대부터 곤궁한 삶을 살 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명 유민 대다수는 조선에 들어온 지 100년이라는 시간이 지난 후에야 겨우 조선의 하급 실무직이나 허울뿐인 관직을 얻었을 뿐이었다. 그나마 ‘잊혀진 명나라의 유민들을 찾아 그들을 복권 시키라’는 왕의 명령이 없었다면 이루어질 수 없었을 것이다.
또한 베트남으로 들어간 명 유민들도 있었다. 일부 명나라 출신 군인들이 베트남 북부로 이주하려고 하였으나 청나라와의 관계를 우려한 찐씨 가문도 그들을 받아들여 주지 않았다. 이들 대부분이 명나라 멸망 이후에도 정성공(鄭成功)을 따르며 반청복명(反淸復明) 운동에 가담하였기 때문이었다. 결국 이 집단은 찐씨를 떠나 응우옌씨에게 향하였다. 응우옌씨는 , 찐씨와의 경쟁에서 우위를 확보하기 위해 이들을 받아주었다. 이제 명나라 출신 군인들은 응우옌씨 휘하의 군인이 되어 베트남 남부 개척에 나섰다. 본래 크메르(캄보디아)의 땅이었던 현재 베트남 남부 지역의 대부분이 바로 이 시기에 편입되었다. 이들이 얼마나 열심히 싸웠는지 대장 중 한 명이었던 진상천(陳上川)은 베트남 사람들에게 신으로 추앙받기에 이르렀다. 조선의 사례와 달리 베트남에 정착하였던 명 유민과 그들의 후예 중에는 그래도 조정의 고관까지 승진한 사례가 몇몇 확인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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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2 비엔호아에 있는 진상천(陳上川)의 신상(神像)과 패위(牌位)
출처: 蔣爲文, 「越南明鄉人陳上川生卒年考察」, 『亞太研究論壇』65, 2018.
상인 출신들도 각 나라에서 충분히 활약하였다. 베트남 하띠엔(河仙, Hà Tiên)에 정착한 막(鄚)씨 일가는 광동에 거주하는 동남아 일대를 왕래하던 상인이었으나, 후일 고향을 떠나 동남아로 이동하였다. 그러다 마침 크메르 국왕에게 관직을 받았고 하띠엔의 총독으로 부임하였다. 하띠엔은 당시 응우옌씨 정권과 크메르 사이의 접경지역으로 정치·군사·경제의 중심지였다. 훗날 응우옌씨와 여러 차례 전쟁을 벌였던 시암(태국)은 반드시 이곳을 거쳐서 베트남으로 진격하였고, 크메르와 응우옌씨도 여러 차례 이곳에서 전쟁을 벌였으며, 무역을 위해 상인이 모여드는 곳이 바로 하띠엔이었다. 이런 중요한 지역을 담당하는 장관으로 상인 출신의 명 유민을 임명하였으니 대단한 파격이 아닐 수 없었다. 막씨 이외에 무명의 보통 상인들도 베트남을 왕래하다가 고국의 멸망 소식을 듣고 그대로 현지에 눌러앉게 되었다. 명향사(明香(鄕)社, Minh Hương xã)나 호이안(會安, Hội An)에 남아있는 중국 회관(會館) 거리는 당시 호이안에 얼마나 많은 화인들이 거주하고 있었는지를 가늠해볼 수 있는 중요한 유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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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3 호이안 거리 풍경 : 명향취선당
출처 : 직접 촬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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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4 호이안 거리 풍경 : 광조회관
출처 : 직접 촬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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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5 호이안 거리 풍경: 복건회관 출처: 직접 촬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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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6 호이안 거리 풍경: 조주회관 출처: 직접 촬영
류큐에는 일찍이 14세기 무렵부터 명나라 상인들이 정착하기 시작하였는데, 이때부터 주요 가문 출신 인물들이 류큐의 외교사절이 되어 명나라로 파견되었다. 그러다가 17세기에 들어 유입된 상인들도 류큐 조정의 고관으로 활약하거나 류큐에서 동남아시아로 가는 선단을 이끌고 무역과 외교활동에 참여하는 등 적극적인 활동을 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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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7 오키나와 민인36성(閩人三十六姓)의 후예들이 단오절에 용선(龍船)을 몰고 있다
출처: 「閩人三十六姓入琉球 沖繩與中國感情臍帶 (毛峰)」, 『亞洲週刊』 28期, 2023.
출신이 명확한 사람들의 이야기는 비교적 잘 알려졌지만, 대다수 유민화(流民化) 된 유민(遺民)들의 이야기는 전해지는 바가 거의 없다. 유명 가문 출신이 아닌 이상, 그들에겐 지켜야 할 가문도 없었을 것이고 특별히 후손에게 가문을 기억하고 당부도 하지 않았을 것이다. 아마 대부분은 자신들의 신분을 숨기고 현지 사람들과 다르지 않음을 보여주기 위해 더 노력하였을 것이다. 현지 상황에 적응하지 못하면 살아남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들의 삶을 역추적하는 일은 굉장히 어렵다. 이것은 모든 지역의 명 유민에게서 나타나는 공통적인 현상이다.
이들의 삶을 추적하기 어려운 또 하나의 이유는 일정 시간이 지나고 모든 지역에서 공통적으로 민족 동화 정책을 추진하였기 때문이다.
조선에서는 명 유민을 따로 찾으라는 지시가 있기 이전에 그들을 최대한 조선인과 같이 대우하고 조선의 틀 안에 가두어 놓았지만, 요역 면제와 같은 경제적 우대정책을 펼쳤다. 베트남에서도 모든 화인(華人) 우대정책을 폐지한 19세기 중반 이전에는 화인 우대정책을 펼쳤다. 하지만 조선 내부에서도 점차 명 유민을 조선화하려는 움직임이 나타났고, 베트남에서는 과거(科擧) 시험 자격을 부여하지 않는 등 사회적 진출을 막는 정책도 시행하며 급진적인 베트남화를 시도하였다. 급진적인 동화 정책으로 인하여 이방인이었던 이들은 점차 정착한 나라를 “우리나라”로 인식할 수 밖에 없었다.
19세기, 조선에서 간행된 『황조유민록(皇朝遺民錄)』에는 우리나라(明)를 잊어가는 요즘 것들에 대한 한탄과 우리는 조선과 다른 황조의 백성이며 이를 잊어서는 안 된다는 저자의 외침이 나타났다. 베트남에 있는 많은 명 유민의 후예들은 자신들이 명 유민의 후예인지 모르는 경우도 상당하다. 대만의 저명한 베트남 명 유민 연구자인 장위문(蔣僞文)은 “현장 답사를 나갔을 때, ‘사실 당신은 명 유민의 후예입니다’라는 말을 해주고 나서야 인터뷰 대상자들이 명 유민의 후예라는 것을 아는 베트남인도 많았다”는 답사 후기를 들려주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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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8 왕덕구(王德九, 1788~1863)의 『황조유민록(皇朝遺民錄)』 출처: 서울역사아카이브
이런 이들이 명 유민의 정체성을 유지하고 있던 사람들의 후예라는 것을 알 수 있는 가장 큰 증거는 바로 이들이 연대를 표기하는 방법을 살펴보는 것이다. 명 유민의 후예들은 강희(康熙), 건륭(乾隆), 가경(嘉慶) 등등 청나라 연호가 아닌 명나라의 마지막 연호였던 숭정(崇禎)이나 남명의 마지막 연호였던 영력(永曆)을 사용한다. 이 연호는 건축물, 서적, 비석 등에 주로 나타난다. 수백 년의 시간동안 고집스럽게 지켜 온 연호 안에서 이미 현지인이라는 정체성을 가졌음에도 자신들의 출신을 잊지 않으려는 노력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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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5 『廣東陳氏大同譜』, 1925. 출처: 저자 직접 촬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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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6 전남 해남군 황조별묘(皇朝別廟)
출처: 저자 직접 촬영
인터뷰를 위해 만난 광동(廣東) 진씨 16세손 전라남도 해남군 황조(皇朝)마을 이장 진판규씨의 메신저 프로필에는 자신의 본명 대신, 대명유민광동후인(大明遺民廣東後人)이라는 이름이 적혀있다. 진판규씨는 인터뷰 마지막에 자신이 광동 진씨의 후손이라는 것을 감출 일이 아니라고 덧붙이며 메신저 프로필 이야기를 하셨다. 진판규씨는 청년세대 역시 이제는 자신들이 광동 진씨의 후손임을 자랑스러워한다고 말했다. 제남(齊南) 왕씨(王氏) 12대손인 왕종락씨 역시 ‘본인은 대한민국 사람이지만 명 유민의 후예’라고 인식하고 있었다. 위의 두 분은 분명 한국인이라는 명확한 정체성을 가지고 있지만, 동시에 명 유민 출신이라는 복합적인 정체성을 가지고 있었다.
1980년대 오키나와에 거주하고 있던 명 유민의 후예들은 자신들의 선조가 태어난 고향에 방문하는 행사를 진행하였다. 이들은 복건성의 여러 지역을 방문하고 자신들의 후예로 추정되는 사람들과 교류하였다. 안타깝게도 이후 그 행사가 몇 차례나 더 이어졌는지는 파악하지 못하고 있다.
곧 21세기의 중반을 맞이하는 시점에서 4세기 전에 정착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돌아보는 것이 어떤 의미가 있을까? 유민들의 후예는 현재를 살아가고 있다. 누차 세대를 거듭해오며 이들은 남의 나라가 아니라 이제는 “우리나라”에 살고 있지만, 여전히 복합적인 정체성을 유지하고 있다. 소위 말하는 ‘민족’이라는 개념이 형성되기 이전에 이주한 사람들이 어떻게 이런 의식을 가지고 있을까? 이것은 동아시아에서만 나타나는 특별한 현상일까? 그렇다면 명 유민 후예들의 행적을 토대로 이러한 과정을 추적해볼 수는 없을까? 나아가 이들을 토대로 앞으로 수없이 많이 생길 이민자들의 미래도 예측하고 대응할 수 있지 않을까? 명 유민 연구는 이러한 질문에 대한 답을 품고 있다는 점에서 현재적 의미를 갖는다.
대만 國立成功大學 대만문학과, 박사수료 서원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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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朝鮮王朝實錄』
『大南寔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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