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만의 혼종성 고찰: 사민 문화를 중심으로
‘서발턴 (subaltern)’ 이란 개념은 학계에서 통용되거나 일상적으로 자리 잡은 단어는 아니다. 이 어사(語詞)는 이탈리아의 정치이론가이자 행동가인 안토니오 그람시로부터 유래하여, 라나지트 구하(Ranajit Guha), 가야트리 스피박(Gayatri Spivak) 등 여러 학자가 사용하였으나 그들이 사용한 서발턴의 의미는 각기 다르다.
서발턴은 주로 콜로니얼, 포스트콜로니얼 연구에서 사용되어 온 개념이다. 포스트 콜로니얼 지형에서 ‘서발턴(subaltern)’ 이란 용어는 대표성이 없는 개인이나 집단을 말하는데, 이들의 권익을 대리하는 조직은 제한되며, 지배적인 사회 질서가 서발턴의 목소리를 가로막고 있다.
만약 서발턴이라는 용어를 대표성이 없는 개인이나 집단을 말하고, 그들의 권익을 대리하는 조직은 제한되는 것으로 규정한다면 대만은 그 자체가 타자화된 존재 그 자체다. 대만의 목소리가 국제사회에서 대변되지 않는다는 점에서 그 국가적 속성은 기본적으로 서발턴이다. 대만이 타자화된 배경에는 중국과 미국의 타협에 있었고, 당시 중국과 미국은 대만 문제를 완전히 풀 수 없었기에, 오히려 대만 문제를 주변화시켜 놓았다. 여기에 더해서 대만 내부에는 대만인의 고아의식, 결손 국가의식 등, 하소연할 곳 없는 이상(異狀)적인 대만인의 정서가 깔린 곳이다.
대만의 국제지위도 그렇다. 마치 ‘홍길동’과 같아서 대만인들은 자신의 국가를 국가이면서도 국가라 칭할 수 없다. 나라 이름도 마찬가지다. 대만을 어떻게 불러야 하는지 대만 내부에서 정확한 합의가 아직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정식 국명은 ‘중화민국(Republic of China)’지만, 오히려 지명인 ‘대만’으로 더 많이 부른다. 대만은 국가를 자격으로 하는 UN이나 국제기구에 가입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설령 올림픽이나 APEC, WTO 등에 가입했더라도 공식적인 국가 명칭으로서가 아니라 차이니스 타이베이(Chinese Taipei, 中華臺北) 등의 이름으로 국제조직에 가입할 수밖에 없다. 현재 중화민국(대만)과 수교한 국가는 13개국에 불과하다. 이중 중미 지역 과테말라와 벨리즈, 카리브해에 아이티, 세인트키츠 네비스, 세인트루시아, 세인트빈센트 그레나다 등 4개 국가가, 태평양 지역에는 마셜 제도, 나우루, 팔라우, 투발루 등이, 남미의 파라과이, 아프리카의 에스와티니, 유럽의 바티칸이다. 유일한 유럽 국가인 바티칸 역시 중국과 외교 관계를 맺고자 하는 목적을 가지고 있다. 실은 1971년 중화민국이 UN에서 축출된 이후 교황청은 대만에 대사를 파견하지 않았고, 사실상 양국 간의 관계를 강등했다.
대만(중화민국)과 수교를 맺은 13개의 외교 관계를 살펴보면, 인구가 10만 명 미만인 나라가 6개국이다. 이는 대만의 행정 구역 구(區)보다도 적다. 이들의 GDP 총액은 대략 1,642억 달러로, 대만 GDP의 약 20%에 불과한 실정이다.
현재 국제사회에서 절대다수의 국가는 대만을 국가로 인정하지 않는다. 코로나19가 왔을 때도 대만은 WHO에도 가입하지 못하고 있었으며, 실제 대만의 목소리를 대변할 사람과 국제조직이 부재하였다. 더구나 민주주의의 핵심은 자기가 자신의 앞날을 결정하는 일이다. 중국과 미국의 패권으로 인해 현재까지도, 대만인 2,350만의 앞날을 대만인 스스로가 결정할 수 없는 안타까움이 있다. 대만인의 깐까(尴尬, 난감함), 우나이(无奈) 정서가 짙게 새겨진 이유다.
필자는 이러한 대만의 문화를 요해하기 위한 방편으로 원주민, 이민, 식민, 후식민 즉 4민 문화로 대만 문화를 이해하는 주제어로 사용한다. 이는 필자가 대만의 서발턴(subaltern)을 연구하기 위한 의도에서 인위적으로 추출한 것으로, 본격적인 대만의 서발턴 연구에 앞서 먼저 대만 문화의 전모를 4민이라는 단어로 총괄하고자 했다. 즉 사민 문화란 필자가 대만 문화의 전모를 개괄하기 위해서 추출한 일종의 인위적 분류의 틀이다. ‘사민 문화’의 틀로 대만 문화의 혼종성과 이를 통해 대만 문화의 독특성을 이해하기 위해서다. 즉 사민 문화를 통해서 대만의 역사와 문화의 혼종성을 고찰할 수 있고, 이를 통해 대만의 다양한 인적 구성원들과 역사적 경로를 추적하여 대만 문화에 대한 이해를 높일 수 있다. 다시 말해 사민 문화는 필자가 대만의 혼잡하고 이질적인 문화를 읽어내려는 의도에서 추출한 네 가지 키워드다. 대만은 사민 문화가 그 기저에 있기에 여러 면에서 잡회성을 띠고, 이로 인한 인구, 족군, 언어, 이민, 등 충돌과 갈등의 복잡한 양상을 보인다. 대만의 4백 년 역사는 곧 사민의 역사며 이들 요소가 켜켜이 쌓여 형성된 이질적이고 혼종성의 문화적 맥락이 지금까지 이어져 오고 있다.
-
17세기 초 대만 원주민
무엇보다도 대만의 역사와 문화를 관찰할 때 두드러지는 점은 원주민의 땅에서 이민과 식민이 동시에 진행되었다는 점이다. 특히 대만 전역이 통치자의 권역에 들어왔을 때는 비교적 늦은 시기인 일제 강점기 때의 일이다. 대만은 이민과 식민을 겪으면서 다인종, 다족군 (multi-ethnic) 다언어 등 다양한 이질적 문화가 공존하는 사회가 되었다. 즉 원주민(原住民), 이민(移民, 선이민, 후이민, 신이민), 식민(植民), 후식민(post-colonial, 後植民) 문화 즉 사민 문화라는 틀을 통해서 대만의 역사와 문화의 혼종성을 파악한다. 나아가 다양한 대만의 인적 구성 관계와 그 역사적 경로를 추적하여 대만에 대한 이해를 높이는 데 사민 문화의 이해가 필수라고 인식한다.
-
명·청대 대만 이민
사민 문화는 혼종성(Hybridity)을 띤다. 필자는 대만 혼종성의 개념을 호미 K. 바바의 저작인 『문화의 위치』에서 주장한 내용을 기반으로 한다. 바바의 혼종성 이론은 데리다의 영향을 받아, 단일하고 명확하게 경계 지어진 내부(자아)와 외부(타자)의 구분 대신 양자의 겹침과 혼합을 강조한다. 혼종성은 이러한 관점을 나타내는 용어다. 바바의 혼종성 이론에 따르면, 문화는 절대적이고 고정된 경계가 아니라 차이들이 상호 교섭하는 공간으로 이해된다. 문화는 변형과 혼합의 과정을 통해 전달되고 유지되는데, 이는 다양한 차이들이 서로 다른 형태로 반복되며 유지되는 것을 의미한다. 이러한 차이들은 주로 본토 문화와 혼혈 문화, 자아와 이중성 간의 구분을 통해 나타나는데, 중요한 점은 이러한 차이(변종, 혼혈)가 부정되거나 억압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혼종성은 차이들이 반복되고 변형되는 과정을 의미한다. 혼종성은 식민지 권력과 그 변형의 힘, 그리고 고정성과 관련된 생산성의 상징이라고 할 수 있다.
-
Homi K. Bhabha의 저작 『문화의 위치』
대만의 역사는 사민 문화가 복합적으로 얽히고설켜 쌓인 400년의 역사다. 여기서 4백 년이란 대만의 문화를 알 수 있는 최초의 기록인 동번기(1603년)부터 시작한다는 의미다. 1603년 진제(陳第)는 대만 남부 시라야족의 문화를 처음으로 기록한다. 아울러 원주민, 이민, 식민, 후식민은 서로 연관되어 있다. 가령 식민으로 인해서 일부 극소수를 제외하고는 원주민 문화가 해체되었으며, 식민지 세력이 중국 연해 사람들을 대만으로 이주민을 모집했거나, 혹은 자의에 의했건 아니면 타의에 의했건 위험을 감수하고 밀항하여 대만을 택한 경우다.
대만은 대두왕국(大肚王國, ?—1732), 네덜란드(1624∼1662, 38년), 스페인(1626∼1642, 대만 북부 16년), 명정(1662∼1683, 정성공, 정경, 정극상 3대 21년). 청나라(1683∼1895, 212년), 일본(1895∼1945, 51년), 중화민국(과도기, 1945∼1949), 중화민국 (국부천대 기간, 1949∼현재)의 통치를 받았다, 특히 1999년 전까지만 해도 현 집권당인 민주 진보당은 장제스의 중화민국을 외래정권으로 규정했다. 특히 식민지와 이민은 대만에서 거의 동시에 시작되었다. 각 통치세력은 동남 연해의 이민을 불러들였다. 아울러 오랫동안 외래정권의 식민을 경험한 대만은 형식적으로 식민통치가 끝났음에도 후식민(post colonial) 문화가 여전히 존재하고 있다. 따라서 이민, 식민과 후식민은 상호 연관되어 있다. 필자가 사용하는 후식민은 그 식민문화가 연장된다는 점에서 후식민이라는 용어로 사용한다. 후식민 현상은 형식적으로는 식민통치를 벗어났지만, 식민지 문화가 연장되는 데 있다. 과거 식민모국의 정치적 압박과 경제적 박탈을 탈피하지 못하고, 아직 민족(nation)의 구축이 미완인 채로 남아 있는 것을 의미한다.
-
대만 남부 가오슝(高雄) 홍마오강(红毛港)
바오안당(保安堂)에 설립된 아베 기념 동상
대만은 시대에 따라 여러 민족의 점령과 충돌을 경험하였다. 식민통치자에 대한 호불호도 개인의 관점에 따라 각기 다르다. 더구나 대만은 17세기의 구제국주의와 19세기의 신제국주의, 중화세력과 반중화세력의 지배를 모두 경험하였으며, 또한 그 역사적 시기, 지리적, 문화적 정체성, 정치환경 등 당시의 복잡한 국제정치 상황과 관련을 맺고 있다. 다시 말해 대만은 여러 제국주의의 식민통치를 겪으면서 다양한 문화들이 혼재하게 되었고, 이러한 여러 이질적 문화가 섞여 있는 혼종성을 필자는 대만 문화의 특징 중 하나로 꼽는다. 물론 이러한 혼종성은 대만 문화를 풍부하고 독특하게 만들기도 하지만, 다문화가 공존하는 대만의 이질적이고 혼종적인 다양성을 분석하는 일은 쉬운 작업이 아니다. 하지만 대만을 우리와 유사한 패턴 즉 일제 해방, 과도기, 반공, 냉전, 계엄체제, 민주화 등 틀에 박힌 도식으로 대만의 역사와 문화를 이해한다면, 대만의 전모를 완전히 볼 수 없다는 것이 필자의 판단이다.
대만은 사민 문화의 영향으로 여러 이질적인 문화가 중층적으로 쌓이고 쌓인 혼종적인 문화를 형성하고 있다. 이로써 인구, 족군(ethnic group), 언어, 이민, 정치성향 등 여러 분야에서 충돌과 갈등의 양상을 보인다. 대만은 해양문화로 바탕으로 삼고, 네덜란드와 스페인의 식민무역, 명・청 시기의 한족・원주민 간 통혼, 일본의 식민통치, 장제스와 장징궈로 대표되는 중화 문화, 미국 문화 등과 최근 동남아에서 온 노동이민, 결혼이민 등 여러 이질적인 문화가 상존한다. 종합하자면 대만은 이민으로 구성된 다양한 문화가 공존하는 이민 사회라 할 수 있다. 특히 대만은 네덜란드・스페인의 서구 해상세력, 명나라 정성공・정경의 중화 해상세력, 청대의 이민과 개간, 이민문화로 인한 대만 내에서의 민란과 계투, 국부 시기의 2・28, 백색테러, 성적(省籍) 갈등, 대만의 민주화에 큰 영향을 미친 1979년의 미려도 사건, 1980년대 말부터 시작된 대만의 민주화와 본토화 운동, 1990년대 말의 다문화 족군 운동 등에서 첨예한 갈등과 충격을 경험한 뒤 현재 다원 족군 융합의 추세로 진행하고 있다. 그렇지만 대만 내부의 문화적, 정체성 갈등이 완전히 해소된 것은 아니다. 여전히 대만 내에서는 대만 민족주의와 중국 민족주의가 경쟁하고 있다. 이를테면 스밍의 『대만인 사백년사』로 대표되는 대만 사관과 롄헝의 『대만 통사』로 대표되는 중화 사관이 부딪히고 있다. 이를테면 대만은 아직도 대만인 스스로에 대한 정체성의 갈등을 겪고 있는 셈이다. 이는 사민 문화가 완전히 융합하여 다족군 다문화의 민주화 된 사회로 진입하지 못하였음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선거철이 되면 대만 내부의 각 정치 진영은 통・독 논쟁 격화, 중화사관과 대만사관의 갈등, 중화 문화 정체성과 대만 문화 정체성을 구축하려는 시도가 서로 갈등한다. 이는 근본적으로 대만을 구성하는 족군의 복잡성과 원주민, 선이민, 후이민, 신이민의 역사, 여러 제국주의의 식민지를 경험하면서 누적된 역사의 기억이 아직 해결되지 못한 결과다. 특히 대만을 둘러싸고 해양세력과 대륙세력의 갈등은 현재 진행 중이다. 이들 세력에게 대만은 여전히 불침의 항공모함으로 보인다. 이처럼 중・미 간 갈등 정도를 잴 수 있는 온도계로 작용하는 곳이 바로 대만이다. 이에 따라 대만의 전략적 가치가 과거에 비해 매우 높아졌다. 더구나 한반도에서 일어난 청・일 전쟁, 한국 전쟁 등은 대만에 결정적 영향력을 미쳤다. 청·일 전쟁 결과 대만이 일본에 할양되었고, 한국 전쟁 발발 이틀 뒤 미7함대가 대만해협에 개입하면서 현재의 양안 관계가 고착되었다. 마치 대만 문제와 한반도 문제가 톱니바퀴처럼 맞물려 있는 셈이다.
최근 대만해협의 파고는 다시 높아지고 있다. 우리가 대만 문화를 기존의 중화민국 체제의 시각이 아닌 소외된 자들의 시각에서 연구해 보는 일도 의미있는 일이다.
동서대 중국연구센터 연구교수 강병환